눅 15:11-24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는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어서 죽기를 바랐던 아들이다.
아버지와 그 가정을 등지고 떠났던 아들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맞아주었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보았다.
몰골이 흉측해져서 파수꾼 조차 그를 몰라봤으나 아버지는 그를 알아봤다.
아버지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스플랑크니조마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 9:36, 14:14, 15:32, 18:27, 20:34, 막 6:34, 8:2, 눅 7:13)"
'스플랑크니조마이'
누군가 자신에게로 달려온다.
용맹한 전사처럼 거침없이 질주한다.
누굴까? 아, 아버지다!
아들은 뒷걸음질 치려다 넘어졌다. 그대로 엎드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지진이 나는 것 같았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를 덮는다.
그의 고개는 순식간에 들어 올려지더니 아버지의 품을 만났다.
아버지의 냄새. 그리고 자신의 악취를 느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다시) 낳았도다.(시 2:7)”
고대 중동에서 이런 아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마을의 명예요 율법의 도리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품 속에 숨겼다.
"이 아들은 내게 속했다.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러니 돌을 던지려거든 내게 던져라."
이 아들을 위한 잔치가 열렸다.
아들이 돌아왔다! 그 기쁨은 잔치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아들을 향해 돌을 던졌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로 인해 그 아들을 기뻐하는 자리에 참여한다.
정죄함이 사라졌다!
그렇게 마을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율법은 성취되었다.
잔치의 주인공은 돌아온 아들이었다.
그러나 잔치의 화두는 아버지의 은덕이었다.
아버지의 깊은 은혜와 긍휼, 끝 모를 사랑. 아! 참으로 끝이 없는 사랑!!
잔치에 참여한 모두는 그 아버지의 은덕을 칭송했을 것이다.
주인공 자리에 앉은 아들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기다렸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말하며 그리워했는지,
혹시나 돌아올 아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아니,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며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성문 밖과 망루에서 지평선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를..
잔치 내내 아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무슨 사랑인가! 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나는 무엇을 찾았던 것이고 무엇을 잃었던 것인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한 영혼의 구원은 천국의 잔치가 된다.
성도는 모두 잔치의 주인공이 된다.
그 잔치의 화두는 무엇인가?
죽어 마땅한 자를 살리시고 존귀하게 여기신 아버지의 은혜다.
구원받은 자는 그때로부터 영생을 누린다.
그때로부터 그 인생에 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성도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셨고, 어떻게 자기를 지키셨고, 어떻게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지.
성도는 운다.
잔치 내내 그 복된 소식에 감격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는 자가 아들이다.
아들은 힘껏 일어나 잔치에 참여한 모두를 향해 크게 외쳤을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아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