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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Nov 22. 2020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7-8장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다.

 본문은 7장부터 이어진다. 예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성전에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선포한 복음의 메시지가 바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였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자(7:16, 8:26),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7:18), 하나님이 보내신 자(7:29), 생수(7:37-38), 세상(생명)의 빛(8:12), 천국에 속한 자(8:23),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8:29), 하나님의 아들(8:36), 진리를 말하는 자(8:45), 하나님을 아는 자(8:55),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자(8:58).

 이것을 아는 사람은 참 자유를 누릴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음에서 자유하다(8:51).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8:43).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8:19). 이것을 아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는다(8:12). 이것을 아는 사람은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흐른다(7:38).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다(7:17).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분명하고 놀라운 진리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분쟁을 일으키고, 분노했고, 급기야 예수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었다(30-31절).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가! 32절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반응은 다른 무리들과 같았다(33절). 왜?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5)"


 이 구절을 새번역에서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라고 번역했다. 7~8장에서 그들의 이러한 모습과 예수께서 전하시는 진리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7장 45-52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아랫사람들과 니고데모의 판단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판단과 극명하게 대립한다.

 아랫사람들은 지시를 따라 예수를 잡으러 갔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있었고 그 소동의 원인인 한 청년을 잡으러 가는 업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으레 처리해 왔던 업무 중 하나로 여기며 예수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놀랐다.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본 것이었고 누군가의 말이 이렇게까지 생각과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경험도 처음이었다(46절).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행하려던 그 일로부터 도망치듯 돌아왔다. 그들이 판단한 기준은 "그 청년의 말"이었다. 그 기준은 자기밖에 있던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판단 기준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율법이라고 불렀다(49절). 그들이 율법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실제 율법이 아니었다. 니고데모의 지적으로 그것이 드러난다(51절). 그들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이 그들의 율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율법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율법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에 갇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1-24)"


 진리는 배타적이다. 진리가 아닌 모든 것을 모순이라 정의한다. 진리는 영에 속한 것이므로 육체에 갇힐 수 없다. 따라서 육체에 갇힌 것은 모순이다. 진리를 받아 그것을 육체 속에 두면 모순으로 변한다. 오늘날 스스로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모순'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스펄전, 본 회퍼, C.S. 루이스, 조나단 에드워드 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점을 지적하고 깨어나라고 강하게 촉구해왔다. 그러나 그런 날카로운 지적과 외침은 예수님께서 먼저 행하신 것이었다.

 21-24절에서 예수님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비판하신다. 예수님은 '보고 믿은 믿음'을 믿지 않으신다(요 2:23-24). 그러나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고 타당해 보이는가! 너무도 명백한 증거를 기반한 믿음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왜곡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상과 실체를 구분하질 못한다. 우리에겐 '다른' 눈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독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이 잦았던 건 아닐까? (이어지는 9장에서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도 어쩌면..)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요 8:52)"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다. 자기모순에 갇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리는 미친 것이다. 진리만큼 정신 나간 것이 없어 보인다. 예수님의 말에 대한 그들의 대답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모순으로 왜곡하여 이해하는 것을 발견할  있다. (발견해야만 한다! 제발,  글을 읽는 당신을 성령님께서 도우사 자기모순을 깨고 나오길 기도한다.)


 하나만 살펴보자.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22절)"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저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저 말씀 바로 앞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예수님의 말의 의도는 "너희의 죄 때문에 나를 찾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결국 내가 가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였다. 예수님의 말의 핵심은 "오지 못할 것이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죄"에 있었다(24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핵심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자신들의 상식에 맞추어 "그가 자결하려는가?"라는 엉뚱한 추론까지 꺼내놓게 된다.

 그들의 상식, 그들이 갇힌  율법은 무엇인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너희 "라고 말해봤자 그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그곳에 반드시 이르고,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그것을 반드시 찾는다는 율법(맹신)에 갇혀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말이다.  확신이 토해낸 결론은 무엇인가? "예수가 자살하려나보다"였다.  얼토당토않은 결론에 도달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도달한 곳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얼마나 처참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인가! 모순에 갇혀 헛소리를 뱉어대는 그들은 심지어  자유를 누리며 진리만 말하는 분을 향해 "네가 누구냐?"(25)라고 말한다.  질문 정죄의 의도였다. 그들은 예수가 그런   자격도 없고 예수의 말이 틀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5)"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진리를 말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이처럼 자기모순에 갇힌 자들은 예수를 살해한다. 자기 율법을 의지하는 자들은 예수를 향하여 돌을 던진다. 그래 놓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믿으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한다(요 16:2).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과 무엇이 다른가? 제사를 집행한 사울 왕과 무엇이 다른가?

 밧세바를 범한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격분했다.  이야기  부자가 자신일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어찌 그럴  있단 말인가? 그는 자기 율법에 갇혔던 것이다(삼하 12:5-6). 자기가 그런 죄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순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이 되는가? 그러나 자기모순에 갇힌다는 것은 이만큼 끔찍하다. 나단 선지자처럼 대놓고 말해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무지해져 버린다.

 이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긴장해야 한다. 겸손해져야만 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에게 이런 모순이 없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절박하게 기도해야만 한다.


 나머지 31절에서부터 이어지는 긴 논쟁도 마찬가지다.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신다면, 유대인들의 대답이 얼마나 편협하고 모순적이며 완악한 지 보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다.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사 42:3). 이 은혜를 아는가? 이 사랑을 아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고 환영하지도 않는 자들을 위해 죽으러 오셨다(요 1:10-11). 자기 율법에 갇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다. 그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나는 바로  같은 자들을 위해 죽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가?  사랑을 아는가?


 진리를 알게 되면 고꾸라진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따라서 진리를 알게 되는 순간 무지했던 자신의 범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멸시한 분이 얼마나 존귀와 영광과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된다. 그 앞에 고꾸러지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자처럼 엎어지지 않을 수 없다(단 10:8-9, 15-17, 사 6:5, 계 1:17).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알게 된 뒤 가장 감사한 일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형성했던 율법을 깨부수기를 요구한다. 바울은 이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비유한다(갈 2:20). 그렇다. 죽어야 한다. 진리는 죽음을 요구하기에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든다.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고 물타기를 시도한다. 내가 죽지 않고, 적당히 손해를 보는 선에서 진리를 받고자 하는 얄팍한 수를 쓴다. 대다수가 그런 신앙생활을 한다. 대다수가 그러니 그런 '짓거리'가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부정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죽음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느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잘못됨속에 갇혀 버린다. 죽음은 끔찍하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진리를 받을  없다. 육체의 죽음 없이 우리의 영혼진리와 이어질  없다.

 진리는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유하며, 그 진리를 받은 자들을 자유케 한다. 그래서 죽은 자들을 살린다. 죽음도 참 자유를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리를 아는 자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그 삶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다음 감사한 일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들은 욥이   있는 것이라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지금까지  없이 뱉어온 말들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지성인이었던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 곳곳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큰지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애씀은 결국 찬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설명할  없었기 때문이다! 디모데에게 설명하려 했을 때는  진리를 말하기에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죄인인가를 갑자기 상기하기에 이르렀다(딤전 1:15). 미치지 않음이 은혜다. 도무지 인간의 육체로 감당할  없는 지혜다. 창세 전부터 계획된 일을 역사의 찰나를 살다가는 인간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단순히 있었던 사실만 나열한다 해도 아마 예수님이 역사 속에 등장하시기도 전에 모든 뇌는 터져 버리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자는 역설적이게도 "모른다"라고 고백한다. 그들이 진리를 아는 것은 순전히 성령의 능력에 의지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게 된 진리가 그 실체에 비해 얼마나 작고 미약한지를 감각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실존하시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지를 더듬어 본 자는 감히 그분을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분에 대한 어떤 것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손으로 입을 막고 무지한 육체를 티끌과 재 가운데 들이밀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 가난한 마음으로 살뿐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1)"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예수님은 믿은 자들에게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신다. 믿었다고 다 제자가 아닌 것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아직 나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C.S. 루이스는 자신이 세 번 회심했다고 말한다. '회심'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 단어 말고는 표현할 다른 단어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C.S. 루이스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 다윗왕의 반응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신비에 속한 자가 될지 생각해볼  있을 것이다. 다윗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왕좌에 앉히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다. 그는 그의 삶을 통해 이것을 경험했고 확증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경험하고  것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자기 판단 속에 하나님을 가두려 하지 않았고, 자신 또한 갇히려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다윗은 정신을 차릴  있었다.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아닐까? 이는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임을,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분이란 것보다  믿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 믿음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스스로 옳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정말로 그러한지 생각해보지 않는다. 지나친 확신은 우상숭배와 같다. 오히려 성경은 자기 구원을 의심해보고(고후 13:5),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도전한다( 5:10).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의심한다. 의심을 통해 진리를 더욱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반정립 같은 것이다. 진리를 아는 자들만 의심할 수 있다. 그들만이 의심이 초래할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은 연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때론 짓궂을 때도 있고 시덥잖을 때도 있고 본질적일 때도 있다. 그 질문으로 인해 오랜 시간 씨름하고 갈등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상대방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포용이다. 적극적인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심은 바로 이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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