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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Nov 03. 2018

속초

 문이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좀 더 힘을 주어 몇 번을 더 돌리자 문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침대라 부르기 민망한 것이 방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발치에 지갑과 가방을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제 뭐하냐. 


  한숨을 몇 번 쉬었는데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 누우니 머리칼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을 떠보니 몸통에 짓눌린 왼쪽 어깨가 보였다. 여긴 항상 너의 자리였다.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넌 항상 내 왼쪽에 누웠다. 열대야에도 이불은 걷어차면서 이 어깨에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코 끝을 어깨에 짓누른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섬유 냄새 조차 나질 않았다.


 하릴없이 걸었다. 바람이 선선한 걸 보니 여름도 끝장이다. 해변엔 아직 밝은 하늘에 폭죽을 쏘고 있는 머저리들과 모래를 차며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 나온 사람들인가 보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안 먹었다. 마침 편의점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뚱뚱한 비둘기처럼 매장을 뱅글뱅글 돌다가 우유를 사들고 나왔다. 해변을 따라 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구겨진 가슴도 풀리지 않았다. 두어 번 들이킨 우유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저 하늘에 그걸 쏜다고 불꽃이 보이기는 하나? 뭘 좋다고 저렇게 웃고들 있는지.. 


 너는 바다를 좋아했다. 나중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끄덕였던 것 같다. 난 바다는 별로였거든. 소금기가 찝찝하고 모래도 싫고. 육지에선 쉽게 지치는 네가 바닷속에선 물개처럼 헤엄쳤던 걸 봤다. 그러다 일광욕을 즐기는 거북이가 되었고 파도의 끝에 발을 참방대는 불가사리가 되었다가 다시 깊숙이 잠겨 유영하는 돌고래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아이는 바다구나. 라고.


 습관을 따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놨건만, 하루 종일 스팸 광고 조차 오질 않았다. 세상이 통째로 날 밀어내는구나. 


 신경질적으로 문고리를 흔들어 방문을 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어둠이 방문해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네, 당신이 반가운 건. 그래서 불을 켜지 않고 침대로 향하다 침대 발에 발가락을 찧었지만. 아픈 게 가실 때쯤 서러움이 밀려왔다. 왜 난 아무도 없는 이 방에서조차 어금니를 꽉 물고 아픔을 참았을까? 어릴 때부터 의사들은 내가 아픔을 잘 참는다고 말했다. 턱이 아릴 정도로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허리춤에서 빛이 세어 나왔다. 엄마에게 온 전화. 

아들, 오늘 집에 오니? 하루 종일 연락이 없어서. 

"아, 엄마. 나 오늘 친구네 집에서 잘 것 같아요." 

그래, 일요일에 할머니 생신, 알지? 

"네네, 알아요." 

그래 

"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내 메모장에 네가 끄적인 글이 보였다. 전에는 그냥 네가 쓰는 소설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이제 보니까 나에게 그 말을 하려고 넌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어. 왜 그때 몰라줬을까? 나는 항상 무엇보다 널 가장 살피고 헤아리고 이해한다고 자부했는데. 그렇게 교만해져서는 너 혼자 아파하게 내버려뒀구나.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해. 어제 이 말을 더 해주지 못한 게 서러워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둠이 나 대신 울어줬다. 처량하고 한심한 소리를 내며. 


 다음날 아침 하늘은 솜구름으로 아름다웠다. 아랫지방에 들이닥친 태풍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인 것 같다. 좋아하는 만화에 나오는 명대사가 생각났다. 사랑은 언제나 허리케인. 거세게 뒤엉키어 견고하고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조각과 그 중심의 공허함. 종국의 소멸. 그래 사랑은 태풍이다. 지나간 자리에 남기는 엉망인 상처들. 


 얼굴을 보고 말할 용기가 없어 너는 전화를 했다. 아니, 내게 전화해달라며 문자를 보냈지. 사랑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에 언제나 콧방귀 뀌며, 저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했던 우린데. 네가 말하고 내가 들으니 그제야 말이 되었다. 나는 목구멍에 걸린 단어들을 가슴을 후려치며 하나씩 토해냈다. 심장박동 신호를 바라보며 혼신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하는 의사처럼, 이 신호가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걸 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끝나버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이어야 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온몸에 흐르는 걸 느꼈다. "좋은 아침." 나도 모르게 세어 나온 말에 놀라 숟가락을 놓았다. 너도 이 시간이면 일어났겠구나, 늦잠을 잤으려나?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뒤 서로 출근을 준비하느라 바빴던 매일의 아침.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난대 없이 닥친 소나기에 혼비백산한 피서객들이 보였다. 여름이 끝나가는 마당에도 기어이 바닷가에 나온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부산히 움직였다. 가게 입구에 서서 그 광경을 보다가 빗속으로 팔을 내밀었다. 샤워기에 손을 대고 있는 듯. 열 걸음도 채 안돼서 속옷이 젖어붙는 게 느껴졌다. 앞이 잘 보이질 않았다. 너와 이렇게 빗속을 걸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갑자기 내린 폭우를 어느 가게 입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십분 정도 서 있었나?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우린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네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너는 마냥 신나 있었다. 그 사랑스러움은 우리의 깍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참 우습게도 5분 거리에 있던 목적지에 도착할 쯤이 되니까 비가 그쳤던, 아름다운 순간. 

 또 언젠가 너는 편지에 명동에서 함께 비를 맞던 추억을 적었었다. 습한 날씨와 많은 인파 속에 쏟아진 폭우, 난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었는데 너에겐 한 편의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춥다. 지금 이 비는 너무 차갑다. 그때의 비들은 어떤 온도였지? 운동화 속에 비가 차올라 걸을 때마다 밟혔다. 차량 경적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겨우 비켜섰는데 저 파도 소리는 빗소리를 뚫고 내게 호소했다. 그래 차라리 너도 내게 저렇게 호소했으면, 너의 감정, 생각, 기분, 너조차 몰랐던 너의 마음까지 전부. 어느새 코앞까지 치고 올라와 금방이라도 날 삼켜버리려는 이 바다처럼, 그러지 그랬어. 


 샤워를 하고 티비를 켰다. 전국적인 호우경보. 너에게도 비가 내렸구나. 네가 나의 바다라면 나는 너의 비였으면 좋겠다.


 시간을 갖자. 너는 말했다.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사실 나는 시간을 싫어해. 시간이 내게 준 건 기다림과 그 기다림을 더욱 힘들게 만들 추억뿐이거든. 하지만 시간을 갖길 원했던 네게 내 모든 시간을 준 나는 모든 것이 멈춰버린 이곳에 갇혀있는 기분이야.  


 아침에 한 뉴스가 저녁까지 이어지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하루가 흘러가며 몇 가지 뉴스가 추가될 뿐이었다. 하루 내내 멍청하게 앉아 티비만 보니 눈이 뭉쳐왔다. 티비를 켜 둔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오른쪽 허리가 아파서 뒤척이다 보니 뒷주머니에 지갑이 걸렸다. 지갑을 꺼내 내용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영화 티켓과 함께 세 번 접힌 쪽지가 나왔다. 반쯤 번진 손글씨는 너의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하자고 했던 것들, 함께 보기로 한 영화 목록, 가기로 한 맛집 목록. 함께해야 할 것들이 아직 이렇게 많이 남아있는데..


 편의점에 나가 종이와 팬을 사 왔다. 문득 뭔갈 적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막상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랐다. 냉장고 문을 열고 뭘 하려고 했는지를 까먹어서 바보같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팬을 놓았다 들었다를 반복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9시 47분.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다시 팬을 놓고 티비를 봤다. 아나운서들의 인사로 하루가 끝나고 의미 없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너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까?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일까? 너도 수십 번씩 핸드폰을 들어 나를 찾으려다가 한숨 밑에 덮어놓으며 하루를 보낼까? 다시 한 문장을 적었다. [보고 싶다.] 


 할머니 생신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건강하신 모습.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있는 그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캔버스에 잘 그려진 그림을 보는 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다시 속초로 돌아왔다. 전에 묵었던 곳에 방을 잡았지만, 이번엔 창문이 바다 쪽을 향해 있었다. 하염없이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볕은 아직 따사로웠지만 바람은 차가워졌다. 이따금 가을의 냄새가 커튼 밑으로 스며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너에게 가고 싶다.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고 아무 말이라도 듣고 싶다. 날 바라보는 너의 눈동자를 보고 싶다. 적당한 거리에서 느껴지는 너의 샴푸 냄새를 맡고 싶다. 그것은 이 가을바람과 닮았다.  


 우린 아직 헤어진 게 아니다. 그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난 기다린다. 바다에 들어가진 못하고 모래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응시하는 침침한 눈으로 네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너는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내게서 가져간 그 시간으로 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난 바보같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누가 좀 대답 좀 해줘. 파도가 크게 밀려왔다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입맛은 없는데 배는 고프다.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아무 과자를 하나 집어 들고 나왔다. 빈 봉지를 버리려 들었는데 뒷면에 실종아동을 찾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너무 알고 싶지만 알 길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해와 달의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그러나 만난다면, 아무 말 못 하고 왈칵 끌어안을 것만 같다.


 너는 곧잘 우리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한 때는 나도 그 말에 동의했지만, 언젠가부터 그 말을 경계했다. 특별함은 마치 어떤 드라마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금과 같은 아픔을 느껴야만 하는 그런 드라마. 그냥 남들처럼 사랑하고 남들처럼 행복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면 다들 우리와 비슷하단 걸 알았다. 비슷한 사랑을 하지만 비슷한 이별은 아니길. 특별함을 경계하면서도 특별함을 바랐었다. 사랑은 원래 모순적인 거야. 웬수 웬수 하면서 그의 숟가락에 고기 한 점 얹어주는 거야. 


 작은 공책을 사서 카페에 앉았다. 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인물화를 그렸지만 나에겐 너의 풍경화가 더 인상적이었다. 괜스레 뭔가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코 앞에 놓인 컵 하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내 수준이었다. 어느 평범한 날에 너는 내 커피잔 밑에 작은 쪽지를 숨겨뒀었다. 그날따라 커피 마시기를 더뎌했던 나 때문에 넌 속앓이를 했었다. 드디어 내가 잔을 들어 그 쪽지를 발견하고 너의 사랑을 읽고 너의 존재에 감동할 때, 그런 날 보는 너의 표정을 난 잊지 못한다. 그 표정은 그 어떤 화려한 수사보다 확실하게 우리의 영원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랬었다.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강제된 일상은 그 말부터가 참 모순적이다. 일종의 놀이 같았다. "얼음"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고 누군가 와서 "땡"을 해줘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놀이. 사랑한다는 말로 우리는 끌어안을 수 있었고 누군가 이별을 말하면 그럴 수 없는 이 관계가. 그렇게 우린 누가 정한지도 모르는 규칙을 따르며 살고 있던 것이다. 


 하루 종일 하늘은 회색이었다. 무채색은 사실 색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무채'란 의미 뒤에 '색'이란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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