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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an 27. 2019

소보로 빵

 나는 곧장 파리바게뜨로 들어갔다. 점심은 아직도 다 소화 되질 않았고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빵이나 두어 개 사 먹을 요량이었다. 손으로 버튼을 눌러야 열리는 이름만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한 여인의 옆모습이 들어왔다. 아이보리색 숏 패딩 위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손에 든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엔 니트로 된 연한 쑥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치마 끝자락과 신발 사이에 하얀 발목은 이곳에 진열된 모든 빵들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케이크가 진열된 코너로 향했다. 거기서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는데, 언제나 이 순간이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었다. 뒷모습이나 옆모습에 시선이 끌리더라도 정면에서 큰 실망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일부러 정면을 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있을 때 비로소 추앙받을만한 법이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지만, 인류 역사상 이 순간이 자유로웠던 적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귀여운 외모였다. 화장도 진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케이크를 둘러보며 맞은편에서 빵을 고르는 그녀의 왼손을 주시했다. 반지는 없었다. 여전히 전화를 들고 있는 오른손에도 액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았다. 그런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아무 빵이나 대충 집어 들었다. 그녀도 빵을 고르는 것보다 통화가 더 중요하다는 듯 진열장을 여러 번 맴돌았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나는 곧장 계산대로 향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이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카드를 쥔 그녀의 엄지손가락에 큐빅을 박은 분홍 매니큐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에겐 말을 걸 용기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녀를 그냥 보내버렸다. 매장을 벗어나는 그녀를 향해 단 한순간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아쉬움과 망설임과 합리화까지 포기해버린 채 남아버린 감정은 오로지 실증이었다.

 난 도무지 여자들을 견딜 자신이 없다. 아무리 예쁘고 잘 꾸민다 할지라도 입만 열면 나오는 특유의 대화 양식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화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고 날 좋아해 주는 여성들도 있으며,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만남이라도 유쾌한 시간을 보낸 적 있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모든 경험을 통틀어 대다수의 경우가 짜증에서 실증에 이르는 아주 신속하고 진절머리 나는 대화였다는 게 문제다. 사실 이렇게 편협하고 속이 좁은 내가 궁극적인 문제겠지만, 서른이 넘고 나서부터 나를 바꾸는 건 이미 포기 해 버렸다.

 난 계산을 하다 말고 빵을 하나 더 집어 들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8년을 교제한 여성과 파경 한 2년 전부터 어머니는 나의 혼자됨을 안타까워하셨다. 우습게도, 그런 어머니께 내가 드리는 건 귀엽게 생긴 며느리가 아니라 건조한 팔꿈치처럼 생긴 이 소보로 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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