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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루 Jun 09. 2018

동인천역

 동인천역에 내려서 핸드폰 어플로 길을 찾아 들어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골목길을 10분 정도 걸은 것 같다. 초등학교가 끝났는지 곳곳에서 삼삼오오 뛰어가고 재잘대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꼬맹이들마다 거리에 정적을 남겨뒀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자란 잡초나 담장을 타고 올라간 넝쿨 가득한 동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더위는 한풀 꺾인 탓인지 스산한 기운이 느껴져 걸음을 재촉했다.


띵동-.

 초인종 버튼의 플라스틱 커버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정교하게 누른 초인종 소리는 크고 명랑했다. 우울한 쇳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어 왔어? 잘 찾아왔네. 연락하지. 마중 나갔을 텐데.


 너스레를 떨며 날 반기는 민섭. 지난 주말 초등학교 동창모임에서 만난 인연이 날 여기로 이끌었다. 민섭은 내 하나 남은 초등학교 사진 속에서 나와 신나게 웃음 짓고 있던 친구였지만, 그 후로 수십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기억의 수면 근처에 닿아본 적 없는 친구였다. 어떻게 우리가 친해지게 됐는지, 같은 반이었는지 태권도 학원 친구였는지, 왜 연락이 끊어진 건지, 이 사진은 언제, 누가 찍은 건지.

 날 먼저 알아본 건 당연히 민섭이었다. 난 민섭이가 사진을 보여주기 전까지 이상한 놈, 친구인 척 보험 따위를 팔아보려는 녀석 정도로 생각했었다. 빛이 바래버린 사진 속 꼬맹이와 중년의 김민섭은 전혀 딴 사람이었지만, 분명 둘은 같은 인물이었다. 동창회 내내 우린 구석에 앉아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서로의 기억을 이어보려 진땀을 뺐었다. 헛수고였다. 어색한 정적을 깨기 위해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그래서 지금 무슨 일 해?

나 그림 그려.

그림? 무슨 그림?

그냥 뭐.. 그때 그때 생각나는 걸 그리는 거지.

그러니까, 장르가 뭔데?


 그때부터 밤새도록 미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마지막쯤엔 술기운 때문에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네 작품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렇게 민석이네 작업실에 오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석이네 집을. 분명 1층이지만 반지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었다. 혼자 살기엔 꽤 넓은 편이었지만 창문은 몇 개 안되었고 그마저도 집 옆에 딱 붙어 있는 산을 향해 있으니 햇볕이 들리 만무했다. 되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흙에서부터 습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민섭이는 한쪽 구석으로 구겨져있는 이불 뭉치 옆에 나를 앉힌 뒤 믹스 커피를 대접했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긴 뒤에야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안 곳곳에 캠버스와 낱장의 종이들이 널려있었다. 온통 민섭의 그림. 그 순간 강한 바람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수많은 그림들이 저마다 생명력이 있어 별안간 군중 앞에 선 것처럼 털끝이 쭈뼛함을 느꼈다. 그래, 이건 이중섭 화가의 작품을 처음 보았던 때 느꼈던 짜릿한 압박감이었다. 이건 유학 중 만난 피카소의 작품들 앞에 파르르 떨게 만들었던 그 바람이었다. 아, 신이 자신의 모습을 숨길 때 우연이란 단어를 쓴다고 했던가? 이 만남은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 아닌가? 죽음의 끝에 감은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눈 앞에 펼쳐진 천국이 이 상황을 설명할 유일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구원자의 얼굴을 보듯 바라본 민섭의 얼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부처의 얼굴도 이리 공허했을까? 아니, 되려 민섭의 텅 빈 표정에선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졌다. 신의 조각들인 민섭의 집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정작 그 선지자는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나의 모든 찬양과 찬사와 흥분 앞에도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난 뱃속 깊이 분노가 끓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찌 이토록 무책임하단 말인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사지를 찢어 죽였던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섭, 넌 지금 대단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거야.


 찬양도 분노도 회유도 소용없었다. 이 아름다운 작품들 앞에 나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민섭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지도 전시하지도 선물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 집이 이 성스러운 그림을 보관할 수 있는 유일한 예루살렘인 양 엄한 대제사장처럼 나의 모든 요구에 완강한 거절을 표했다.


난 지금 네 말도 아주 불쾌해. 너의 그 찬사들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솔직히 비꼬는 것 같단 기분을 지울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짧은 한숨 뒤로 나온 민섭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우리 와이프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어주겠단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민섭은 부끄러웠다. 이토록 완벽하고 신성한 그림이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망할, 질투가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공허하며 불쾌한 그의 표정을 찢어버리고만 싶었다. 저주스럽게도 재능이 없는 나는 비굴하게 예술의 언저리에 찝쩍대며 살고 있건만. 천사의 손을 받은 이 녀석은 자기가 받은 이 축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분해서 눈밑이 떨려왔다.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 속의 남성처럼 발가벗겨진 채 광야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민섭은 날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난 이 가엾은 신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어느새 난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 개만도 못한 낙서를 작품이랍시고 전시하는 이 파렴치한 세상에 필요한 건 그대들이 건만 어찌 이런 음습한 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인가! 묵시록에 비밀을 담은 인을 뗀 구원자처럼 그대들을 묶고 있는 인을 끊을 수만 있다면. 나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면, 기꺼이 끊어버리고 빛 가운데로 그대들을 인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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