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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짝 May 13. 2024

심해어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넷


다시 약을 챙겨 먹는데도 불구하고 K군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집니다.


건강한 상태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상생활이 자꾸만 어렵게 느껴집니다. 밖에 잘 나가지 않게 되니 사회활동과 인간관계에서 점차 멀어지고, 이 상태가 더욱 심해지면서 대인기피증마저 생깁니다. 가족 외에는 사람을 대하는 것도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러자 바깥에 나가기는 더 어려워지고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집니다. 우울증의 악순환에 빠진 것입니다.


얼마 후 조언자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개강을 했는데도 K군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평소라면 친구의 전화가 반가웠겠지만, 지금은 그가 자신의 안부를 묻는 것마저 부담스럽습니다. K군은 자신의 우울증이 많이 심해져서 휴학했다고 간단히 설명하고는, 다음에 연락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K군은 이 친구는 물론, 다른 지인으로부터 오는 연락을 전부 안 받게  됩니다. 소위 말하기로는 ‘잠수를 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번 전화를 해 보던 친구들도 하나 둘 연락을 포기합니다. 처음 전화했던 조언자 친구만이 ‘상태가 좋아지면 연락해 주라’는 문자를 남겼을 뿐입니다.


외부와 연결을 끊은 채, K군은 방구석 폐인과 마찬가지인 생활을 합니다.


밤늦게까지 인터넷 서핑을 하고 동영상을 보다가 지치면 겨우 잠들곤 하는데, 그렇다고 이런 것들에 딱히 흥미를 느껴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너무 심심해서 시간 때우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단 잠자리에 들면 한낮에나 잠에서 깨는데, 그나마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무기력한 자신의 상태를 곱씹습니다. 지난 조증 시기에 했던 어처구니없는 행동과 말들이 문득문득 기억나서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그가 했던 실수들을 포함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한 자신을 자책합니다.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고 기분은 더욱 가라앉습니다. 마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허리가 아파 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누워 있는 데도 한계가 온 모양입니다. K군은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샤워를 안 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기분은 찝찝하지만 씻는 것이 귀찮습니다. 아니, 귀찮다기보다는 씻을 기운도 없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게다가 외출도 안 하고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씻을 이유는 더욱 없어 보입니다. 씻지 않으니 자연히 지저분해진 몰골이 되고, 그 모습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민망합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씻지 않습니다… 우울증의 또 다른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슬슬 배가 고픕니다. 점심때는 이미 한참 지났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식사는 제 때 나와서 하라며 잔소리를 하셨는데,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식탁에 밥을 차려 두십니다. 샤워를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데도 밥은 어떻게든 먹게 됩니다. 입맛이 당기는 것도 아니지만, 배고픈 상태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나마 간신히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불편함을 피하려는 본능뿐인 것 같네.’ 이런 생각이 들자 K군은 밥을 먹으면서도 자괴감을 느낍니다.


식사를 마친 K군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컴퓨터 게임은 거의 안 합니다. 게임은 경쟁적인 요소 때문에 피곤한 데다가,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게 힘들어서입니다. 그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자동으로 연속 재생되는 유튜브 영상을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매일 이런 생활의 반복이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진료일에는 애써 병원에 갑니다. K군에게 이 날은 정말 힘겹습니다. 우선 외출하기 전에 샤워를 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과제입니다. 나가기 싫어 늦장을 부리게 되다 보면 예약된 시간에 맞춰 가기가 빠듯하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대중교통을 타고 갈 때 보이는 풍경도 매번 보는 것이지만 이상하게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가는 길에 어쩌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게 됩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도 불편한 기분이 듭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증상을 물어보셔도 전처럼 조리 있게 말이 나오지가 않습니다. 너무 말을 안 하고 지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사히 처방전을 받고 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진이 다 빠집니다.


침대 위에 쓰러져 엎드린 채로 K군은 생각합니다.


‘밥 먹고, 약 먹고, 멍 때리고, 자고…….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버텨야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잠수를 타는 걸까


이미 심한 우울증 상태에 들어서 있다면 거기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K군이 지금 느끼는 심정은, 햇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둡고 깊은 해저의 심해어의 느낌과 비슷한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거의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는 심해어는 그 모습도 특이하고 기괴한 것이, 마치 평범하고 건강한 모습을 잃고 왜곡되어 있는 K군 마음의 형태 같습니다. K군은 스스로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못났다고 혐오합니다. 이 정도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되면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자연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지인이 연락을 해 와도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들어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나눌 적당한 소재도 떠오르지 않고, 상대방을 대할 자신감도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연락을 한 두 번 피하다 보면, 왜 전화를 받지 못했는지도 설명(또는 변명)을 해야 하니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연락을 아예 끊는 지경에 이릅니다.


때로는 일상적인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제대로 해 낼 수 없다고 느낀 나머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도 합니다. 특히 조증에서 우울증으로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은 경우, 조증 시기에 벌여놓은 여러 가지 일들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포기하는 시점에 아예 손을 놓아 버리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는 일이 조울증 환자에게 종종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심해어 생활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심해어처럼 지낸다고 해서 죽은 듯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해어가 나름의 방식으로 깊은 바닷속 환경에 적응해서 살고 있듯, 조울증 환자도 우울증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그 상태에 점차 적응하게 됩니다. K군처럼 가족의 도움으로 현재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울한 생활 패턴에 익숙해져 버릴 가능성이 더 큽니다. 우울증에 적응한 생활은 모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비교적 에너지 소비가 적은 생활을 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는 안정적인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 소모가 적고, 외부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적으면 정서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일도 적어집니다. 그런데 우울증 상태가 안정적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두었을 때 우울증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너지 측면과 달리 환자의 심리적인 면은 불안정한데, 스스로 자신을 공격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조울증 환자는 우울기에 비정상적인 생활 때문에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것은 스스로도 한심하게 느낍니다.


이렇게 우울증에 빠진 조울증 환자는 겉모습과 속마음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당사자의 괴로움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이 그 마음을 짐작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울기의 환자는 겉보기로는 별생각 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기 십상입니다. 심지어 괴로운 정도가 임계점을 넘으면 자해나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과 함께 K군의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단 우울증의 악순환에 빠지면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우울증이 그 자체로 다시 우울증을 깊게 만드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중간에 그 고리를 끊어내기 어렵고, 그래서 우울증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요소를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불규칙한 수면 및 생활 습관

야외 활동과 일조량 부족

대인관계 부족

자책이나 자기 비하


그러므로 이와 반대되는 습관을 실천하면 우울증의 악순환을 벗어날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충분한 수면 취하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잠 자기

적당히 운동하면서 햇빛 쪼이기

마음 맞는 사람과 대화 나누기

자존감 키우기


너무 뻔해 보이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나 환자들은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일들조차 실천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졸음운전’ 편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졸릴 때 스스로 잠 깨기가 힘든 것과 비슷한 원리로, 우울할 땐 우울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실행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시도할 만한 난이도가 더 낮은 실천 방법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조금이라도 실행에 옮기기 쉬워 보이는 행동부터 시도해 봅니다. 예를 들어 샤워가 힘들면 세수만이라도 하고, 양치가 힘들면 가글로 대신해 봅니다. 산책할 엄두가 안 안다면 핑계를 만들어 가까운 편의점에라도 다녀옵니다. 또 우울기에는 병원을 다니는 것 자체도 큰일인데, 병원 가는 것도 더 쉽게 해야 합니다. K군이 우울증 중에도 계속 진료를 받으러 다닐 수 있었던 데는 병원이 집에서 멀지 않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헬스장을 다닐 때도 집이나 직장에서 가까워야 가기 싫은 마음이 들 때에도 어떻게든 가서 운동을 하게 되는 것처럼, 병원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병원을 다녀오고 진료를 받는데 총 서너 시간이 걸릴 정도라면, 우울기에는 진료를 받으러 갈 엄두를 내기가 더 힘든 게 당연합니다. 기왕이면 오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 집 근처 좋은 병원을 찾아보는 노력도 필요해 보입니다. 쉬운 일을 굳이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건이 된다면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습니다. 혼자 산책을 나가는 게 어렵다면, 동행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갈 사람이 있으면 바깥바람을 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한 바퀴 걷고 난 뒤에 커피숍 같은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우울감을 해소하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 중에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더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서 도움을 주면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언제나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형편상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양극성 우울증은 몇 달, 혹은 그보다 긴 시간 동안 환자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기분이 회복되는 시기가 옵니다. 그런데 깊은 우울증을 겪고 난 뒤일수록 그 반사 작용으로 심한 조증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울증 환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때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너지 수준이 단기간에 급상승하면 또다시 경조증이나 조증이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기분 변화의 조짐이 느껴지는 시기에는 짧은 기간 단위로 잘 관찰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시기에는 진료 주기도 짧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면 또한 조울증의 어려움 중 하나입니다. 우울증이 지나갔으니 다 끝났다, 하고 마냥 좋아하기만 할 수 없습니다. 우울증에서 조증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안정된 상태를 잘 붙들어 두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면 환자의 병식이 확고해야 하고 가족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며 주치의와 처방약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현실에서 이런 조건들이 모두 잘 맞아떨어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K군은 우울기에 너무 적응해 버리거나 그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나 심해어 노릇을 하며 해저 바닥에 붙어 지낼 수는 없는 일이므로, 천천히 위를 향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상승하면 급격한 수압 차이 때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여유를 가지고 수면 쪽을 향하다 보면 결국 점점 밝아오는 햇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K군은 우울증이라는 길고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우울증이 심한데 병원 진료를 빠뜨리지 않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완전히 손을 놓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신호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금 K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가족의 도움인데 그의 부모님은 아직 이 병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울증 상태의 K군이 스스로 방어막을 쳐서 그런 점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도 이들 모두는 조울증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조울증은 환자와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공부해서 알아가야 할 점이 많은 병입니다. 그런 만큼 K군도, 그의 가족도 경험과 학습이 더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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