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짝 May 17. 2024

리튬 이온 배터리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다섯


지난해에는 처음 겪은 조증 때문에 혼란스럽더니, 뒤따른 우울증은 해가 바뀌는 동안에도 K군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렇게 길고 느리게 우울증을 통과하는 동안, 계절은 봄과 여름을 지나 어느새 가을이 됩니다.


어느 시점이 되자 K군의 기분이 서서히 나아집니다. 특별히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도 않았는데, 한낮까지 자던 수면 패턴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조금씩 밖에 다닐만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매일 기분을 기록하는 것이 기분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생각나 일기를 적기 시작합니다. 조언자 친구를 비롯해 그동안 연락 못한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우울증이 끝났구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K군은 진료 시간에 이런 내용을 주치의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약을 줄이거나 끊을 수 있지 않겠냐며 기대에 차서 요청해 봅니다.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K군의 기분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이전 진료 때 표정이나 말투에서 느껴지던 우울감이 사라진 대신 지금은 오히려 많이 과장된 느낌이 든다고, 그리고 수면 시간이 갑자기 짧아진 점도 걱정스럽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울증에서 안정기를 건너뛰고 경조증 단계로 튄 게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봄, 가을과 같은 환절기에는 일조량 변화가 크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기분 변화가 일어나기 쉽다는 설명도 덧붙이십니다. 하지만 K군은 그런 말들이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고, 얼마 후 가을학기에 복학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씀도 드립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것도 신중하게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학업이나 인간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 요인이 나타나 또다시 조증을 유발할 수도 있으니, 일단 기분을 안정시켜 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K군은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오면서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립니다. 우울증 시기 내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었던 만큼 앞으로 대학 생활을 더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결국 K군은 복학 절차를 마치고, 개강한 학교에 오랜만에 나갑니다. 그간의 사정을 묻는 사람들마다 한동안 연락 못했던 이유를 일일이 해명하는 것은 꽤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일이 좀 있었다고 대충 둘러댑니다. 조언자 친구도 K군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는 K군을 조용히 관찰해 온 거의 유일한 사람입니다. 친구는 K군이 마지막으로 연락할 때보다 들떠 보여서 불안감이 들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와서 기분이 좋아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K군은 동아리나 같은 학과 사람들과 술을 많이 마시던 예전 생활로 돌아갑니다. 특히 술을 마셨다 하면 필름이 끊길 정도로 폭음을 하는 습관도 여전합니다. 술을 끊으라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낮에는 가을학기 전공 수업을 따라잡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봄 학기를 쉬면서 한 학기에 해당하는 전공 내용을 건너뛰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K군은 생물학 전공이라 외울 것이 대부분인데, 그는 암기에 무척 약한 편이라 공부할 때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진도를 따라잡겠다고 밤새는 날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자주 술을 마시느라, 그리고 밀린 공부를 따라잡는다고 잠을 별로 못 자는데도, 별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짜증스럽고 예민할 때가 많아집니다.


K군은 이번에도 약을 끊기로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놀거나 공부를 하려면 늦은 밤까지 깨어 있어야 하는데, 약을 먹으면 생각이 둔해지고 졸음이 오기 때문입니다. 저번에는 기분이 가라앉는 중이라 단약을 하자 우울증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반대로 기분이 뜨는 상태인데 약을 끊으면 그대로 조증까지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확실히 약을 끊고 처음 얼마 동안은 집중력도 올라가고 공부에 탄력이 붙습니다. 남들보다 공부할 양이 두 배는 되는데도 어느 정도 잘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인지 경조증의 익숙한 느낌이 반갑습니다.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기분 좋은 충실감, 이 느낌을 그동안 그리워했습니다. 지금 기분대로라면 분명 잘해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K군은 생각합니다.


‘이번에야 말로 약의 도움 같은 거 없이 제대로 해 보자고! 저번에는 처음이라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럴 리 없을 거야.’




완전 충전과 완전 방전은 모두 좋지 않다


요즘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부터 전기 자동차까지 두루 쓰이는 충전지는 상당수가 리튬 이온 배터리입니다. 제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런 배터리에는 탄산리튬이라는 화합물 형태로 리튬이 들어 있는데, 배터리의 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편 조울증의 치료에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쓰이고 있는 약 중에도 리튬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 약의 주성분도 탄산리튬입니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용도에 리튬을 주원료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순전히 우연이겠지만, 이로부터 K군의 조울증과 리튬이온 배터리의 특성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약이 심해 억지스러운 면도 있는 것 같지만, 일종의 언어유희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울증의 증상 변화를 뇌의 에너지 수준의 변화와 관련지어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은 무엇보다 직관적인 방식이라 이해하기 편리합니다. 또한 환자 당사자가 조증과 우울증을 에너지 상태 차이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뇌의 에너지 대사와 양극성 장애의 관계를 알아내려는 연구[1]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 뇌의 에너지 수준이라는 측면을 리튬 이온 배터리와 연결 지어 생각해 봅시다. 조울증의 양 극단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마치 리튬 이온 배터리를 충전하고 방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증을 뇌에 과다한 에너지가 충전된 상태로, 우울증은 에너지가 다 방전되어 버린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뇌에 에너지가 과다한 경우를 배터리와 비교하여 생각해 봅시다. 리튬 이온 배터리는 과다하게 충전하면 변형되어 부풀거나 심하면 폭발할 수 있습니다. 배터리의 특성상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평상시 배터리를 사용할 때 폭발이 일어난다면 큰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리튬 이온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음에도 폭발하지 않는 이유는, 배터리가 지나치게 충전되기 전에 자동으로 충전이 멈추도록 하는 과충전 방지 회로가 배터리마다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드물게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 따로 부치는 짐 속에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배터리를 넣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항공기 화물칸 안에서 리튬 이온 배터리가 폭발해 불이 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일어나는 리튬 이온 배터리의 폭발 현상은, 에너지가 넘치는 조증 시기에 과도한 증상을 보이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예측하기 어렵고, 갑작스럽고, 위험합니다.


배터리와 비교하면 우울증은 뇌에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상태로 생각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리튬 이온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키면 충전지의 수명에도 좋지 않고, 다시 충전하는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이 역시 우울증 때 환자가 받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우울기의 K군에게 필요했던 휴식과 수면, 대화, 운동, 햇빛 쬐기 등이 방전된 배터리를 서서히 충전하는 것으로 비유할 만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를 적당한 수준으로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현재 K군은 말하자면 과충전 상태로 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을 끊은 것, 수면 시간이 갑자기 줄어든 것,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 등은 리튬 이온 배터리로 치면 과충전 방지 회로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충전하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원의 상당 부분은 뇌가 몸 여기저기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와서 충당하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 살이 꽤 쪘던 K군의 몸무게가 최근 빠르게 줄고 있는 것도 뇌에서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끌어다 쓰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충전 방지 회로가 망가진 리튬 이온 배터리를 계속 충전하면 결국 폭발하는 것처럼, 지금과 같은 상태로 K군을 내버려 두면 아주 나쁜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전에 K군에게 조증이 처음 발병했을 때는 그래도 운이 좋았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입원했고, 그 덕분에 자신과 타인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K군은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에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리튬 이온 배터리를 제 수명과 성능으로 쓰려면, 완전 충전 상태보다는 낮고, 완전 방전 상태보다는 높은 충전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조울증 환자가 안정기에 머무르기 위한 방법도 이와 비슷합니다. 조증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도록 컨디션을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마나한 말처럼 간단해 보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해서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야 체득하게 됩니다.


지금의 K군에게는 다음과 같은 지침이 필요했습니다. 수면의 질을 높일 것, 술을 끊을 것, 운동을 할 것, 일정 시간 햇빛을 쪼일 것. 그리고 가장 기본이면서 중요한 것으로, 꾸준히 진료를 받고 처방약을 빼먹지 말고 복용할 것. 너무 바른생활만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병을 잘 관리하는 조울증 환자들은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또 잘 지킵니다.


그러나 지금의 K군에게 이렇게 생활하라는 조언을 한다면 분명 당장 반발하거나 무시할 것이 뻔합니다. 경조증에 매력에 사로잡힌 상태의 조울증 환자라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당부한 대로 수도승 같은 생활만 해서는 학교 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말입니다. 일단 조울증이 발병한 환자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그의 삶이 이전과 여러 면에서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재미나 자극이 별로 없어 보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고, 멀리해야 할 습관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환자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습관들을 환자에게 잘 맞춰서 실천하려면 위에서도 언급했듯 여러 경험과 거기서 생기는 노하우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당사자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게 가능하도록 조율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정해 둔 패턴 안에서 일상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행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환자 스스로 현재 상태를 파악해야 하고(병식이 있어야 하고), 조울증 증상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들은 자제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하고, 가족이나 지인들과도 잘 지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조울증 환자 자신에게 맞는 ‘나만의 바른생활’ 루틴을 만들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K군의 상황은 바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만한 단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K군은 경조증에서 조증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불안한 상태입니다. 관리를 잘못해서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리튬 이온 배터리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것과 비슷하게 과충전에 가까워지고 있는 K군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저번에는 처음이라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럴 리 없을 거야,‘ 하는 K군의 다짐에서, 경조증 때의 자신만만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그가 아직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뿐 아니라 두 번, 세 번, 그리고 여러 번을 반복해도 계속 조울증이라는 병에 휘둘리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도 K군은 모릅니다.


어쩌면 K군이 이제 ‘겨우’ 두 번째 조울증 주기밖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이 조증과 우울증을 겪게 된다면 그 경험을 통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가족 중에 조언자 친구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K군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여전히 조울증이라는 병에 대한 공부가 부족합니다. 이러다 보니 병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당연히 K군 혼자서는 현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필요한 대처를 하지도 못합니다.


K군의 책상 서랍 구석에는 그가 먹지 않은 리튬 알약이 들어 있는 약봉지가 잔뜩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약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그를 조울증으로부터 구해 줄 희망이 그 알약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못합니다.




[1]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습니다: https://scholar.google.co.kr/scholar?hl=ko&as_sdt=0%2C5&q=brain+energy+bipolar&btnG=


이전 06화 심해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