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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짝 May 20. 2024

F1 레이싱 머신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여섯


K군은 경조증이 쭉 지속되리라고 믿고 약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환상일 뿐이었고, 상황은 그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갑니다.


단약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K군의 상태는 빠르게 나빠져 경조증이 조증으로 변합니다. 그 원인으로는 약 복용을 임의로 중단한 것뿐만 아니라, 잠자는 시간이 크게 줄어든 점, 복학한 뒤 받은 스트레스, 그리고 폭음하는 음주 습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병원에 다니고 있을 때 이러한 것들을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경고를 여러 번 들었지만, 지금의 K군에게 그런 조언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만약 기억났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합니다. 적어도 우울증 때는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조증 상태가 심해진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병식이 전혀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K군은 조울증 환자들이 조증기에 하는 전형적인 행동 패턴을 그대로 따릅니다. 말이 심하게 빨라지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입니다. 반면에 남의 말이나 대답은 기다리지 못하고 중간에 끊기 일쑤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또 자기 말만 계속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서 주체하지 못하는데 내용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말하는 중에도 여기저기로 마구 튑니다. 예를 들면, 학교 생활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가, 뜬금없이 종교 이야기를 하다가는, 갑자기 특정 정치인을 비난하다가 사회 문제 비판으로 이어지고, 다시 철학적인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등, 말하는 내용에 맥락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K군의 얘기가 길어진다 싶으면 주변 사람들은 슬슬 눈치를 보고 피하게 됩니다. 예전에 가벼운 조증을 처음으로 겪었을 때와 비교하면 상태가 훨씬 심각합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휴학하고 오더니 애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K군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동기나 후배 여학생 중 마음에 드는 사람마다 사귀자고 작업을 겁니다. 물론 상대 여학생들은 번번이 거절합니다. 좁은 학과 안에서  K군에 관한 소문이 이미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K군은 엉뚱한 데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사귀자고 말로만 때운 것이 잘못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값비싼 향수나 가방 등을 준비해서 선물 공세를 펼쳐 봅니다. 그러나 거절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K군으로서는 왜 여자들이 자신과 선물을 거부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결국 K군의 ‘연애 사업’으로 남은 것은 거절에 따른 자존심의 상처, 그리고  선물을 산다고 쓴 비용만큼 비어버린 통장 잔고뿐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K군의 행동은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특히 평범했던 K군의 모습을 알던 사람들은 달라진 그의 행동을 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울려 주는 동기들이 몇 있기는 합니다. 주로 술친구들인데, 그중에는 K군의 조언자 친구도 있습니다. 이 친구를 뺀 나머지 멤버들은 K군의 이상한 행동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저 안주거리 삼을만한 일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같이 취하다 보면 어차피 누가 더 이상한지 구분이 잘 안 가기도 합니다. 사실 이들이 K군과 어울리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습니다. 주로 K군이 술값을 내기 때문입니다. 술이 잔뜩 취한 K군은 자신의 행동이 놀림거리가 되는 줄도 모릅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자기가 하는 말을 잘 들어준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K군의 말과 행동을 잘 지켜보는 것은 조언자 친구뿐입니다. 그는 K군의 행동이 평범함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봅니다.


술자리가 파하고, K군은 평소 습관대로 폭음을 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간신히 그를 부축하고 택시를 기다리면서, 조언자 친구가 말합니다.


“요즘 너, 전에 입원할 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위험해 보인다고…….”


그러나 만취한 K군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설령 무슨 말인지 들었다 해도, 그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한다면


괴물 같은 성능을 지닌 레이싱 경기 전용 F1 머신은 엔진 출력이 상용 차량에 비해 4~5배 이상으로 엄청나게 높습니다. 게다가 고속으로 주행하면서 트랙을 돌아야 하는 만큼, 레이서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도록 조종 장치도 아주 복잡하고 예민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면 F1 머신을 제대로 운전하기란 굉장히 어렵다고 합니다. 또 하나, 엔진 힘이 좋은 만큼 브레이크의 성능도 굉장히 강력합니다. 필요할 때 순간적으로 감속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증 상태의 두뇌는 조종 장치와 브레이크가 고장 난 F1 머신과 비슷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설명할 때 핵심은 ‘엔진’, ‘조종 장치’, ‘브레이크‘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K군이 보였던 전형적인 조증 행동 패턴을 이 세 가지 비유를 조합해서 단순하게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생각과 말이 지나치게 빨라지는 것은 F1 머신의 엔진 출력이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것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능이 넘치는 엔진이 과다한 출력을 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에 생각과 말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생각과 말의 맥락이 이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튀는 현상은 조종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통제력을 잃은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의 F1 머신을 내버려 두면 최고 속도로 이리저리 휘청거리다가 어딘가에 충돌해서 큰 사고가 나게 되는 것처럼, 심한 조증 상태의 조울증 환자 역시 결국에는 대형 사고를 치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병원에 입원하거나, 법정에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K군이 다수의 여성에게 작업을 걸었던 것은, 조증 상태에서 성욕과 관련된 뇌 활동이 과도하게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K군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구애를 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 중 하나라는 성욕이 보통 때에 비해 더 강화되기까지 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의 예와 마찬가지로 엔진이 과다하게 돌고 있는데 조종 장치와 브레이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성에 대한 욕망이 겉으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당연히 이런 K군의 행동은 일반적인 사회적 기준에서 보면 정상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셋째, 비합리적인 경제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어떤 물건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엔진 과열), 그것을 합리화하고(조종 장치 고장), 최종적으로 결제하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브레이크 고장). K군은 구애에 성공하려면 선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별다른 고민 없이 비싼 선물을 구입합니다. 조증 상태일 때 생각의 속도는 굉장히 빠릅니다. 그런데 생각의 흐름은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맥락 없이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고 패턴은 일종의 ‘매우 빠른 의식의 흐름’ 같아서, 환자 자신은 떠오르는 대로 생각을 이어 나갔으면서도 논리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무모한 경제 활동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K군은 치료를 중단해 버렸고, 그 결과 더 위험한 상태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당장 다시 약을 먹고 치료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약물 치료는 F1 머신의 엔진 출력을 낮추고, 통제 불능으로 예민해진 조종 장치를 적당히 둔하게 하게 해서 조종을 가능하게 해 주고,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운전하기 까다로운 데다가 고장 났던 레이싱 머신을, 평범한 승용차 수준으로 성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 이런 자동차야말로 승차감도 좋고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기에, 일상적인 목적에 알맞습니다.


하지만 일단 F1 머신의 짜릿한 질주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평범한 자동차로 옮겨 타기가 싫을 수 있습니다. 너무 심심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 도로에서 F1 머신 운전하기를 고집한다면 크고 작은 사고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조울증 환자는 조증의 황홀함을 포기하고 안전 운행이 가능한 뇌 상태를 만드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때로는 조울증 환자가 약물 치료를 잘 받는데도 조증이나 우울증 쪽으로 기분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재발하기 쉬운 조울증의 특성상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벌어지곤 하는 일입니다. 이런 불안정한 시기에 조울증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실력이 좋은 레이서 역할을 해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때그때 변하는 뇌의 상태에 맞게 운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험이 쌓이면서 초보 운전자에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수록 조울증의 위기 상황을 관리해 나가기가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물론 자기 뇌의 운전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뇌를 조종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글에서 우울증 이야기를 하면서 졸린 뇌가 스스로를 깨우기 어렵다고 했던 것과는 모순되는 말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경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졸린 뇌 이야기는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우울증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는 예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건만 갖춰진다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약물 치료, 생활 습관 관리, 심리 치료나 상담 등, 접근 가능한 도움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뇌는 ‘뇌 가소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뇌의 복잡한 네트워크는 한 번 발달하면 그대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잘 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기,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햇빛 쬐기 등은 뇌를 건강하게 하는 습관입니다. 이런 습관을 꾸준히 실천하면 뇌의 물리적인 상태가 변화합니다. 건강해진 뇌는 조증과 우울증에 저항하는 힘도 커지므로, 조울증 환자가 병을 더 잘 관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결국 자기 뇌를 잘 운전한다는 것은 뇌를 건강하게 만들고 그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보 조울증 환자로서 K군은 자기가 지금 어떤 차량에 올라타 있는지, 제대로 운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합니다. 실상 그는 F1 머신을 탄 채로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질주하고 있는 중입니다. 게다가 아찔하게 차선을 넘나들며 음주 운전까지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도로를 크게 이탈하여 사고가 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입니다. 조언자 친구가 한 말처럼, K군은 지금 무척 위험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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