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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짝 May 27. 2024

동면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여덟


우울기에 들어간 K군은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지낼 때가 많습니다.


조증 때는 두뇌가 쌩쌩 돌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머릿속에 뿌옇게 안개가 낀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증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언행들이었지만, 기억에는 분명히 남아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 봐도 제정신이라고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아무 여학생에게나 들이대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 쪽팔려 죽겠네!’


교수님께 잘난 체하며 논쟁을 걸던 일이 생각나 민망해집니다.


‘다음에 교수님 얼굴이나 뵐 수 있을까?’


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시비가 붙은 일도 기억납니다.


‘완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겠지?’


조증을 벗어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부끄럽고 괴로운 기억들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때 기억을 삭제하고 싶을 정도지만, 후회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증의 기억들이 또다시 떠오릅니다.


기억이 반복 재생되다가, 이번에는 또 다른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 폭언을 퍼부었던 일은 고민해 봐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런 생각 때문에 부모님과 마주칠 때마다 어색했고, 그 결과 방에서 나가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괴롭고 불편한 기억은 때를 가리지 않고 반복적으로 소환됩니다.


괴로운 생각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은, 일어난 일들을 해결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K군으로서는 조증이 극에 달했던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방법을 모릅니다. 조울증 때문에 그렇게 됐다, 하고 무작정 병을 공개할 수도 없습니다. 조울증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게 다 조울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우울증 상태인 현시점에는 이런 어려운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할 만한 용기도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을 생각하다 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했던 실수들을 곱씹게 됩니다.


이렇게 되새김질하듯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는 것을 반추 사고라고 합니다. K군은 반추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조증 때 했던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을 자꾸 떠올리는 것은 우울감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K군의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외부와 단절된 생활에서 벗어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K군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식사도 거르고 잠만 잘 때가 많습니다. 조증이 가라앉은 초기에 부모님은 일단 안도하셨지만, 이제는 말도 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K군을 걱정하십니다. 하지만 K군의 암울한 마음속까지 아실 수는 없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하십니다. K군은 억지로라도 나가 보려 했지만, 병원까지 한참을 오고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극심한 불안감이 들어 도저히 집을 나서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결국 어머니께서도 포기하십니다.


다시 침대에 누워버린 K군은, 기름칠을 안 한 것처럼 뻑뻑한 머리로 '뭔가 해야 돼'하고 애써 생각해 보지만, 현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그냥 떠오를 리 없습니다. 저번 우울증 때는 그래도 마지못해 일어나서 컴퓨터라도 들여다보는 등 잡다한 활동이라도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누워만 있는 채로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고,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K군이 가끔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화장실을 가야 할 때, 배가 고플 때,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허리가 아플 때와 같이 신체적인 불편함을 견딜 수 없을 때 정도입니다. 무기력함이 그를 내리누릅니다. 이 무기력함을 걷어내 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보지만, 주변 사람을 K군 스스로 다 밀어내버린 상황에서는 다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K군의 앞에는 홀로 견뎌내야 하는 우울증의 겨울이 한참 남아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아주 춥고 길 것 같습니다.




생존 본능과 에너지 절약


찬바람이 옷 틈새를 파고드는 한겨울이 되면, 일 년 내내 따뜻한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계절의 변화에 알아서 적응하도록 강요합니다.


겨울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특히 혹독한 계절입니다. 차가운 겨울을 버티지 못한 많은 동물들이 살아남지 못할 것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기란 드문 일이고, 이 때문에 우리는 겨울의 무서움을 덜 느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든 모르든 겨울은 동물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아주 힘겨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동물들은 이 죽음의 계절에 살아남기 위해 ‘겨울잠’을 자는 행동 방식으로 적응했습니다. 이들은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에너지를 최대한 비축하고, 동면 중에는 에너지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반쯤 죽은 듯한 모습인 가사 상태에 들어가 체내에 모아 둔 에너지를 아주 조금씩 아껴 씀으로써 겨울 동안 생존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K군의 이번 우울증 시기도 계절로 따지면 겨울의 한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뇌의 활동량이 우울증 시기에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동면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K군은 다시 봄이 올 때까지, 즉 기분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중입니다. 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겨울잠을 자듯 오랫동안 잠을 잡니다. 그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모습도 마치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고 머무는 것 같습니다.


자연계의 동면 현상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인 것처럼, 우울증 역시 생존 본능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작용이 우리 뇌에서 일어납니다. 과부하가 지속되는 조증 시기가 길어지면 뇌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양극성 우울증은 뇌가 심하게 망가지기 전에 작동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울기는 뇌가 편안하게 휴식하는 기간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기껏 뇌의 에너지 소비를 절약하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남겨 놓은 에너지 중 상당 부분을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을 하는 데 소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이번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반추 사고는 부정적인 생각을 되새김질하듯 계속 곱씹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K군은 반추 사고 때문에 무척 힘들어합니다. 자신이 조증 때 한 일들의 실상을 조증 이후에 깨닫게 되면, 조울증 환자는 그 기억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우울기 중에도 조증기에 한 말과 행동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K군도 조증기를 벗어나자 평범한 양심과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본인이 직접 일으켰다고는 믿기 어려운 엄청난 사건들을 새롭게 직면해야 했는데, 이게 쉽게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반추 사고에 빠지기 쉽습니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보는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자기 보호를 위해 최소한으로 남겨 놓은 에너지를 스스로를 공격하는 데 가장 많이 쓰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굉장히 모순적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우울증은 더욱 심해지고 치료하기도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심한 우울증은 때로는 수개월 이상 지속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울증의 특성 중 동물의 동면과 다른 것은, 우울기라고 완전히 잠들어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K군이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아주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어서 삶에 대한 의지가 약해져 있고, 정신적으로 탈진한 것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조금씩이나마 활동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과는 조금 다른 동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공복 상태가 괴로워지면 끼니를 때웁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개운해질 것을 생각하고 가는 게 아니라 배변을 참고 있으면 불편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볼일을 해결합니다. 푹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허리가 아픈 정도가 돼야 그제야 일어납니다. 하기 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일상생활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고통을 피하려는 최소한의 생존 본능입니다.


K군이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어머니의 제안대로 병원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울증은 진료를 받고 약물 치료를 해야 하는 아픈 상태입니다. 조울증 환자가 우울기에 약을 먹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우울기가 끝났을 때 갑자기 조증이 올라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약 복용을 한다고 원하는 대로 금세 기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사람마다 약에 대한 반응성, 부작용이 다를 수도 있고, 약을 먹는 시기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울증 환자에게 맞는 약을 찾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기간이 꽤 오래(길게는 수년) 걸릴 수도 있습니다. 조울증 치료에 인내심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조울증의 특성상 여러 번 증상을 겪어 보기 전에는 병식이 생기기 힘듭니다. 만약 이전에 겪은 일들을 거치며 K군에게 확고한 병식이 생겼더라도 여전히 스스로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제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조증에서 우울증으로 기분이 급강하했던 이번 변화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기분 변화의 낙차를 겪는 와중에 딱 맞는 치료를 하고 기분을 안정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K군은 이미 최악의 우울증에 빠져 버렸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본인이 지금 긴 겨울잠을 자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까요? 조증 시기에 너무 무리했던 만큼,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기에 우울기도 겪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하지만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는 긍정적인 사고회로가 잘 돌아가지 않으니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길고 추운 동면의 시기를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그러면 동굴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따뜻한 봄기운을 받아들일 때가 분명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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