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조증 상태가 심각해지면서 K군의 행동이 선을 넘을 때가 많아집니다. 첫 사건은 강의 중에 일어납니다. K군이 교수님께 강의 내용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교수님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수님께 다시 질문을 하고, 교수님은 거기에 답변을 하는 식으로 문답이 한참 이어집니다. K군은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며 질문을 계속하는데, 강의실의 다른 학생들에게는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어느 정도 들어주다 지친 교수님은, 강의를 진행해야 하니까 나중에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마저 질문하라고 하시면서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학생, 요즘 무슨 일 있나?”
그리고 그날 밤 술자리에서 위험한 사고가 벌어집니다. K군은 언제나처럼 일찌감치 잔뜩 취해버렸고, 그가 너무 비꼬듯 말하니까 같이 술을 마시던 동기는 화가 나서 먼저 가 버립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언자 친구와 계속 술을 마시던 K군은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겼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응급실입니다. 옆에는 어머니와 조언자 친구가 앉아 있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술을 다 마시고 가게를 나서던 중에 모르는 사람과 싸움이 붙어 머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응급실로 가는 중에 친구가 전화를 했고 어머니도 놀라서 달려오셨습니다. K군은 아침에 술에서 깬 뒤에야 겨우 치료를 받게 됩니다. 머리를 여러 바늘 꿰매는 제법 큰 상처였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정신과에 다시 가 보라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그러는 게 좋겠다며 같이 가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K군은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지금 자신에게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지도 않고, 게다가 전에 약을 먹어 봤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건너려고 할 때 K군은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가려는 차를 발견합니다. 그는 차를 향해 들고 있던 일회용 커피 컵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합니다. 싸움 때문에 다쳐서 응급실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시비가 붙을 뻔한 것을 어머니와 친구가 간신히 말립니다.
저녁때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오시자, 이번에는 K군의 분노가 아버지를 향합니다. 전날 밤에 있었던 사고와 조울증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조울증은 유전 탓이 크다면서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이런 병을 물려준 원인 제공자인데도 자신의 병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공격합니다. 비난하는 표현의 수위가 폭언을 넘나들 정도로 심각합니다.
이후로도 학교와 집을 오가며 K군은 잔뜩 들뜬상태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을 계속 일으킵니다. 이를 지켜본 조언자 친구는 당분간 학교를 쉬는 게 어떻겠냐며 넌지시 말해 봅니다. 하지만 K군은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일 뿐이라서 학교 생활을 하는 데에는 오히려 좋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에너지 때문에 사고를 치고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K군의 말은 자기만의 논리에 갇혀 있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친구가 보기에 K군은 심각한 조증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조언자 친구는 지금은 무슨 말로도 K군을 말릴 수 없겠다 싶어 제발 심각한 문제를 더는 일으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학교에서 그는 싸움닭으로 소문이 납니다. 교수님들은 넌더리를 내며 K군을 애써 모른 척했고, 주변 학생들도 그를 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조언자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K군이 정신적으로 아픈 상태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급격히 고립되어 가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상황을 개의치 않습니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던 들뜬상태는 학기말이 가까워질 때쯤에야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들떠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급격하게 기분이 옮겨가면서, K군은 두 번째로 깊은 우울증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한 조증 뒤엔 그만큼 심한 우울증이 따라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의사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몸소 체험하면서 K군에게도 이런 패턴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닥친 우울증 때문에 남은 수업들은 물론 기말고사까지 결석할 정도라 이번에도 학기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합니다.
에너지가 정점을 찍더니 갑자기 어둠 속 깊은 밑바닥까지 떨어진 듯 무기력해집니다. 조울증이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는 표현은 진부하지만 그의 경험에 딱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K군이 우울증에 빠져 잠잠해지자 그의 부모님은 오히려 안도하십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해야 했던 그의 폭언과 위협적인 행동이 멈췄기 때문입니다.
K군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지냅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에 관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고 다닐까 하고 생각하니 당혹스럽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이불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립니다. 조언자 친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인데, K군은 생각합니다.
‘정신 나간 짓 하고 돌아다닌 걸 다 아는 녀석인데 무슨 염치로 전화를 받냐고…….’
게다가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은 한참 동안 울리다가 끊깁니다. 방 안은 다시 어둡고 조용해집니다.
컴퓨터에 관심 좀 있는 분이라면 오버클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버클럭은 컴퓨터의 CPU나 GPU와 같은 하드웨어 성능을 제조사에서 설정한 기본 사양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성능을 극대화하여 더 높은 속도와 처리 능력을 발휘하게 하지만, 동시에 시스템의 안정성을 희생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하드웨어가 버티지 못할 정도로 무리하게 오버클럭을 하게 되면 컴퓨터가 아예 부팅되지 않거나, 작동 중에 시스템이 다운되고 재부팅되는 등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게 됩니다.
조울증의 조증 상태는 마치 두뇌의 오버클럭과 같습니다. 조증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고, 사고와 행동이 급격히 빨라집니다. 창의력과 생산성이 극대화되지만, 이 상태는 자칫하면 현실감각을 잃고 무모한 결정을 내리게 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버클럭된 컴퓨터가 과열되거나 시스템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경조증 상태는 간신히 버틸 만큼 오버클럭한 것과 비슷합니다. 정상 작동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아슬아슬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상당한 정도로 성능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 이번처럼 심한 조증인 K군의 상태는 시스템이 거의 다운되기 직전으로 한계까지 오버클럭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오버클럭한 CPU에 심하게 과부하가 걸려 있는 것처럼, 조증 시기의 뇌는 과다한 정보를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상태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뇌에 손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안전장치가 작동하듯, 오래지 않아 두뇌는 자체적으로 급격하게 성능을 낮춰 버리게 됩니다. K군의 상태가 조증에서 심각한 우울증으로 전환될 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컴퓨터의 경우라면 셧다운(Shut down) 되어 꺼져 버리거나 블루 스크린이 뜬 채로 멈춘 상황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여건이 허락한다면 아예 푹 쉬어 줄 필요도 있습니다. 조증기에 지나치게 혹사당한 뇌는 휴식을 필요로 하는데, 우울기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심한 조증의 반사작용으로 그만큼 심한 우울증이 따라오기 쉽다는 점, 그리고 우울증은 당사자를 무척 괴롭게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애초에 경조증 조짐이 보일 때 선제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K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급성기 조증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고, 경고 신호와 주위 사람의 치료 권유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오버클럭을 못 견딘 컴퓨터가 꺼져 버리는 것처럼 우울증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버클럭된 K군이 이번 조증기에 한 행동들은, 조울증 환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들 중 일부일 뿐입니다.
강의시간에 교수님과 언쟁한 사건은 K군이 자아상을 과대평가하고, 말과 생각은 빠른데 논리는 약한 점이 함께 뒤섞여 벌어진 일입니다. 조증 상태일 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남들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아마 K군은 교수님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 논쟁을 했어도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논리적이고 통찰력 있게 말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태도도 문제가 됩니다. 대화나 토론이라는 것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자꾸 끊게 되면 적절한 대화가 될 리 없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게다가 K군은 공격적인 성향도 보이고 있습니다. 조증이라고 해서 기분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심한 흥분 상태 때문에 충동과 분노 조절이 안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나서 시비가 붙었던 것도 이런 공격성이 드러나는 예인데, 이 경우에는 조증 상태에서 폭음을 한 것이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것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필름이 끊긴 K군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행인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고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로 다치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조금 술이 취했어도 상대방과 자기가 물리적으로 싸움이 될 만한지, 그리고 그전에 싸울 만한 일인지 먼저 가늠해 보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K군은 조증의 꼭대기에 있었고, 술기운 때문에 그렇잖아도 부족한 자제력도 잃은 데다가, 과도한 자신감까지 더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막상 싸움이 붙자, 한 방에 나가떨어진 K군은 그대로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가 치료를 받긴 했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얼마 되지 않는 사이를 못 참고 신호를 위반한 운전자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도로에서 보행자가 운전자보다 약자이기 때문에 운전자에게는 안전 운행을 할 의무가 있다, 라는 게 K군의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 자체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K군이 보행자 신호를 어긴 운전자에게 컵을 집어던질 정도로 크게 화를 낸 이유는, 이 사람이 K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규범 체계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조증 상태인 K군의 세계관에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깨졌을 때 참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잘못된 것은 꼭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것도 조증 상태의 환자가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K군은 차를 막아서며 했던 자신의 행동이 정작 도로상에 또 다른 위험을 만들고 있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조증 시기에는 이렇게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고 모순되는 일이 많습니다.
또 아버지를 원망해서 폭언을 한 것은 패륜적이라고 할 만한 심각한 행동이지만, 조울증 당사자의 가정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K군이 아버지를 원망할 때 말한 것처럼 조울증이 유전과 관련성이 높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로 밝혀져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의도적으로 조울증 유전자를 물려준 것도 아닐뿐더러 본인들도 이런 사실을 최근까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군은 자신의 생각과 논리에 따라 집요하게 아버지를 공격하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았다는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증 시기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뒤섞이며 불합리한 결론들을 만들어 내기 쉽고,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망상적 사고를 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증 시기에 환자가 가족을 공격하고 비난하면 무엇보다 난처한 점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런 일들이 계속 쌓이면 가족 관계가 심각하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K군은 꽤나 오랫동안 급성 조증 증상을 보이다가 마침내 그 에너지를 소진했습니다. 그러자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K군은 금세 심한 우울증에 빠집니다. 이렇게 갑자기 우울증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조증 때 벌여놓은 일들을 제대로 끝맺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무리해서 시작했던 가을학기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엉망으로 끝내버렸습니다. 지난번 겪은 우울증보다 더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또다시 잠수를 탑니다. 외부 세계와 연결을 끊은 그는, 의욕이 없고 감정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조증과 우울증을 또 겪고 나서야 K군은 아까운 기회를 몇 번 놓쳤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깨닫습니다. 조언자 친구는 K군의 위험 신호를 포착하고 알려 주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학교를 쉬도록 권하기도 했고, 응급실에 실려간 사건 이후에는 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친구의 말을 들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나 버렸습니다.
K군은 이제 자신이 완전히 고장 나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는 언제쯤에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재부팅에 성공한 컴퓨터처럼 다시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