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밤게리온, 조증, 그리고 우울증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 1995~1996년에 처음 방영한 TV 시리즈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96년, 당시에는 VHS 테이프를 복사해서 판매하는 불법 통신판매가 성행했는데, 기숙사 옆방 친구가 소장하고 있던 에반게리온 시리즈 테이프를 십수 번을 볼 정도로 저는 이 애니에 열광했습니다. 이 작품과의 만남은 제가 이후 생물 전공을 그만두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며칠 전 연휴에 짬을 내서 다시 감상해 보니, 30년 전의 아날로그 제작방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촌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기준으로도 여전히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애니메이션계의 '신세기'를 열었던 작품이라고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업계 종사자, 평론가, 그리고 팬들이 말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수많은 오타쿠를 만들어냈고, 저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감상하면서, 중년이 된 지금도 제가 이 애니메이션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문득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거대 인조인간'(설정상 거대 '로봇'이 아닙니다)인 에반게리온이 저에게 왜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 17살 무렵의 저는 이 애니를 보고 왜 그런 충격을 받았고, 또 푹 빠져 버렸을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쩌면 저는 조울증 환자였던 제 모습을, 조울증을 진단받기도 전인 그때 이미, 에반게리온에서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리즈 2화에서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최초로 '폭주'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한 조울증 환자의 인상을 이 장면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라고 하는 인류의 적(역시 거대 인조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에반게리온은, 일단 폭주하고 나서는 말도 안 되게 강한 그 적을 순식간에 처치해 버립니다. 에반게리온이 사자후를 하고, 적을 향해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며 날아가는 장면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가슴이 뛰곤 했습니다.
https://youtu.be/-olPXm8oJyw?si=3BWVe3VKRO_2qgHm
하지만 조울증 환자 입장에서 폭주한 에반게리온을 저와 비교하며 보니, 이 장면은 통쾌하지 않고 오히려 씁쓸했습니다.
경조증을 넘어 본격적인 조증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조울증 당사자는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넘쳐서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에반게리온의 폭주와도 비슷한 것이, 실제로 신체적인 능력도 종종 한계치를 넘나듭니다.
제 경우도 그랬습니다.
평소의 저는 딱히 근력이 세지도 않고 마른 편이었는데, 한 번은 심한 조증 시기에 저보다 키는 15cm 이상 크고 몸무게는 30~40kg 더 나가던 사람과 싸워서 밀리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조울증 환자가 본격적인 조증에 들어서면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통제하기 어려운지에 관한 설명입니다. 심한 조증 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때, 경찰 두 명이 얄 팔을 잡고 끌어당겨도 쩔쩔매는 장면을, 병원에서 종종 봤습니다.
3화의 전투 씬은 첫 전투만큼 쾌감을 주지는 않지만, 주인공 '신지'(에반게리온의 조종사인 중학생 소년)의 고통이 느껴지는 슬픈 장면이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호기심에 전장에 몰래 숨어든 반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종석에 태워야 했고(덕분에 제대로 조종이 안 됨), 게다가 에반게리온이 전원 케이블이 끊기면서, 5분이라는 제한시간 동안만 움직일 수 있다는 불리한 상황까지 안고 싸워야 했습니다. 여기저기 고통스러운 관통상과 화상을 입었고(이것을 조종사인 주인공 소년은 그대로 느낍니다.), 두 번째 적(사도)을 간신히 처치한 것은 제한시간이 막 끝나려는 찰나였습니다.
https://youtu.be/JVlpL6zujdM?si=Gh1G6A46e4Ruy7qm
에반게리온이 5분 활동 제한 시간을 가진 것, 그리고 그 이후 셧다운 되는 것도 조울증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제게는 보였습니다. 심한 조증 시기는 한없이 계속되지 않는데, 에너지 소모가 워낙 많은 만큼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그 기세가 꺾이게 됩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것은 깊은 우울증입니다.
대개 이 우울증은 아주 깊고, 상당히 오래갑니다. 그래서 조울증 환자에게는 굉장히 괴로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금방 벗어나지지 않는다고 치료를 포기하면, 그 반작용으로 또다시 급성기 조증에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조울증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다'고들 많이 표현하는데, 제 경우엔 '조울증은 대부분의 지옥 생활 중 아주 잠깐 햇살을 보고는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시리즈 전편을 통해 더 박력 있고 자극적이거나 유머러스한 전투 장면, 그리고 야한 장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위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첫 전투(2화), 그리고 두 번째 전투(3화)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보여주는 에반게리온의 모습은, 제 최악의 조증 경험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반게리온에서 조울증 환자인 저의 모습을 발견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감독이나 제작진들이 조울증을 염두에 두고 이 전투 병기를 디자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제가 에반게리온에 저 스스로의 모습을 투사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정획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삐딱한 관점에서 추억의 작품을 다시 감상해 보니, 벌써 스무 번은 족히 보았을 작품을 신선한 느낌으로 다시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족)
마지막 종반부는 여전히 보기 힘들고 지루하더라고요. 너무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내러티브는 제 취향은 아닌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