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지쳐 탈진해 버린 당신에게
* 이 글은 자살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빠르게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저는 우울증이 최고로 심각했을 때, 늘 죽음을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극단적인 선택(자살)을 말합니다.
사실 이런 말로 글을 시작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살에 관해 언급하기를 지나치게 꺼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어떤 유명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표현함으로써 어떻게든 '자살'이라는 용어를 피하는 것만 보아도 이런 경향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체 자살이라는 말이 홍길동의 아버지 이름도 아니고, 왜 있는 그대로 쓰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 사건을 접하면 실제로 자살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가 다수 존재합니다('베르테르 효과', '자살 전염' 등).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살'이라는 용어를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바꾸기만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인 것 같습니다. 전염 효과를 막는 게 목적이라면 표현만 살짝 바꿀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살 사건에 관한 내용 전체를 아예 다루지 않는 게 맞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자살을 언급할 때 순화된 표현으로 바꾸는 것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고, 굳이 자살에 관해 직설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전 세계 국가 중 실질적인 자살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 주제를 피하다 보면 오히려 많은 것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제가 어떻게 하면 '곱게' 자살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저의 심정은 대략 이랬습니다. 삶에 관한 어떠한 긍정적인 전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일어나고 잠드는 것이 괴로웠고, 샤워는커녕 세수도 거의 하지 못할 지경으로 지쳐 있었습니다. 인간관계는 전부 망가졌고, 심지어 가족과의 관계도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그때의 저는, 사람들이 왜 고독사하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제가 죽지 않고 버텼던 것은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라, 불편함 그리고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잠자리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가도, 화장실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했습니다(똥오줌 위에서 뒹굴기는 싫었으므로). 몸을 돌아눕는 것도 힘겹게 느껴지고 식욕마저 사라져 하루 종일 굶다가도, 결국 배고픔은 찾아왔고 그러면 어머니가 차려 두셨던 밥을 깨작깨작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함(부정적인 에너지)이 그나마 저를 움직이게 했던 셈입니다. 이 괴로움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죽을 결심을 하다가도, 죽은 저를 발견할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면 강렬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 상태가 6개월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자살 사고(자살에 관해 생각하는 것)에 빠져 있던 저의 과거 심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 때문에 불편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묘사하려다 보니 다른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을 통해, 혹시라도 주위 누군가의 자해나 자살 시도를 접했을 때 그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자살 사고를 멈추고 다시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제 경우 극심한 자살 사고가 점차 사라지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느껴진 무렵에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가족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저에게는 실제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는 저의 사고방식 역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죽음에 관한 생각은 서서히 물러갔습니다. 자살 사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와 비교하면, 건강한 사고 패턴으로 회복되던 이 시기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점점 강화되는 선순환이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숙자에게 밥을 주는 것보다 일을 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을 해야 자존감도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에는, 대가를 받는 직업적인 것뿐 아니라 취미나 봉사활동 등도 포함합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산다는 점이 당장 중요하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주기 때문에 일은 살아갈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있어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각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보면, 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과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게 되면 물리적, 심리적으로 고립되기 쉽습니다. 은퇴 후 급격히 노쇠하는 어르신들이 드물지 않은데, 이것도 일을 하지 않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직업이 없어도 동호회나 봉사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게 사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부르스 페리 박사의 <개로 길러진 아이>라는 책에 나오는 연구 사례 중에, 오세아니아의 한 부족 일화가 있습니다. 부족 전원이 여러 이유로 죽게 되자, 유일하게 혼자 남겨진 아이는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상실된 사람은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한 인간관계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살 시도를 하거나 실제로 실행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혹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가족이나 지인과의 건강한 연결고리가 ‘단 하나라도’ 살아있다면 자살을 막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제 생각이기도 합니다.
자살자가 죽기 전에 절박한 구조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만약 주변에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평소와 다르게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면, 가볍게 넘기지 말고 대화를 나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성 있는 몇 마디 대화가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