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달력을 받으며 새 세계를 직면하다
받으려 함을 주고자 함이라
오늘 다카 우리 은행을 방문하다.
이전에는 새해에 방문하면 줄곧 만나주던 은행 한국인 직원이 얼굴도 비추지 않고 온 목적에 따라 쇼핑백에 달력 몆 개를 현지 직원 손으로 건네는구나. 일이 많아서, 규모가 커져서 명함을 건네야 현지 직원이 한국 직원의 오더를 받게 되는구나.
순간적으로 생각들이 떠오르는구나.
이미 큰 상사나 큰 고객에게는 달력 선물이 전달되었다고 지나치다 만난 한국인이 귀띔해 준다. 아마도 현지인들에게 줄 것들이 조금 남아 있을 거라 한다.
이게 무슨 구조인가?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받으러 찾아가는 구조다. 오늘은 그래도 감사하다. 달력 몇 개를 받을 수는 있으니 말이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겨우 받는 것은 아니니 그래도 괜찮은 접대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됨은 이런 연유도 있으리라 본다.
이전에 받았던 대접이 이제는 그만큼 받지 못한 서운함이 서려 있으련다. 그러기에 이전, 과거에 받은 인정이나 대접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과의 갈등이 생기는 것이리라. 그때는 내 자존심이 충족되었으나 이제는 자존심에 흠집이 생긴 것이다.
상대는 힘이나 규모가 이전보다 커지는데 그에 비해 나의 존재는 그들의 눈에는 그리 그들과 견줄만하지 못한 위치로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런 사례는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살아왔던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생과 활동을 직면하게 되리라. 낯선 상황에 봉착하면 이미 뇌에 저장된 개념과 경험이 불쑥 떠올라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익숙한 사고로 판단하리라.
그러다 보니, "젊었을 때에, 옛날에, 초창기에"는 어떠했다고 역사를 드리 내밀면서 정겹고 좋았다고 평가한다. 그 말은 결국 현실과의 괴리가 있으며, 이해받지 못한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자존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거기에다 재취업하려는 분들에게는 더 엄청난 심적인 장벽이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나이나 경험 그리고 가치관을 다시 세팅하는 과제가 있다 하리라. 경험자가 아닌 초년생의 자세로 돌아가야 하는 직장의 새내기로 출발한다.
반전의 세계다. 알 수도 없었고, 상상하지 못한 세계인 것이다.
오늘도 다시금 고백한다. 대접받으러 옴이 아니요. 대접하고자 감이라. 큰 손님이나 고객이 아니기에 테이블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줍는 양으로 살리라. 이는 힘 있는 자나 권세가가 아니라서 측은지심으로 자신을 위로코자 하는 독백일까?
세상은 모으고 쌓는데 관심이 있고 그로 인해 없는 이들보다 하고 싶은 일들을 더 할 수 있다고 본다. 그걸 행복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늘 비운데 관심이 있다. 더 쌓지 못해서, 더 인정받지 못해 아쉽고 섭섭하기보다 이제까지 받은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그들은 받아 가진 바를 서서히 날마다 나누는 것으로, 그로 인해 이웃에게 위로, 만족, 인정이 쌓여 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미 받은 어떤 이들도 결국 최소 받은 만큼은 나누는 시기가 오리라. 그렇게 이어지는 세상은 나눔의 천국이 되며 거기에는 만족과 기쁨이 충만하리라. 자신만을 위해서 저장하고 보관한 이들이 도저히 모방도 할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베풂의 행복이 있다.
나는 오늘 받은 그 달력을 들고 사역지에 가 현지 학교 선생님들과 직원에게 안겨줄 것이다. 이는 눈물이 포함된 봉급을 들고 가족을 향한 발걸음과 흡사하리라. 딸린 가족을, 소속한 직원을 살리고 세우는 삶은 도리어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될까?
시소 원리처럼 상대를 세워주기 위해서는 본인의 자존심도 깎여지고 남의 시선에서 멀어짐도 겪게 되나 보다.
보이는 꽃을 위해 땅에 묻힐 한 알의 씨앗이 분명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