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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Quinn Jun 27. 2022

창작과 표절

그리고 유사성,       -유희열 씨 논란에 대하여-

유희열 씨의 '생활음악[LP]' (발매중지)



최근 유희열 씨 표절 논란이 시끌시끌하다. 창작의 고통은 창작자가 되어 보지 못해 알 수 없으나 중고등학생 때 시 창작이나 글짓기 대회에서 ‘창작’ 앞에 머리를 싸맸던 기억은 있다.





 표절 행위가 어떤 심리 상태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의도적일까 아닐까. 표절한 이가 자기 입으로 표절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유희열 씨 사과문을 보면 어찌어찌 이해는 되지만 혹 창작과 표절이 애매한 경계선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경에도 “해 아래는 새것이 없"라고 했고, 장 드 라 브뤼에르가 <특징들>에서 “우리는 너무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든 누군가 이미 다 한 이야기다.”라고 한 이 말도 이전에 누군가 했던 말이다. 나 또한 할 수 있다. 그럼 다 표절인가.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


책 <서재 결혼 시키기> 저자 앤 패디먼은 “대부분의 글쟁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사전 전체에 퍼져 있을 때는 공동 소유인 단어들이 한 군데 모아 놓으면 도둑질 가능한 자산으로 바뀌는” 현상에 매혹되어 있다고 했다. 결합 능력이 곧 창작 능력이라고 본다면, 누군가 이미 결합한 구절들을 다시 사용하는 일을 표절이라고 한다면, 애매한 경계선이 조금 뚜렷해지는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어렵다.













내 메모장에 이런 글이 있다. 정확한 일日은 없는데 2017년 12월이고, 제목은 <우울한 당신에게>다.


너와 너희와

그녀와 그들,

이것과 저것들이,

나에게로 왔다가 어린아이 손에 붙들린 민들레 꽃씨처럼

입바람에 뿔뿔이 흩어져 간다

그것들은 저마다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내게서 가져간 고민과 근심을 틔운다

괴로움과 외로움을 견디어 꽃을 피운 또다른 나들은

다시 어린아이 손에 붙들려 바람에 날아가 싹을 틔운다

그렇게 나는 온 우주에 존재한다


나는 메모할 때 출처 특히 쪽수까지 정확히 메모를 해 두는 습관을 들였고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메모들은 출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이건 내가 쓴 건가 아니면 책에서 옮겨 적은 건가 헷갈릴 때가 있다. 바로 위 시인지 뭔지 정체 모를 글 또한 그렇다. 자세히 뜯어보면 못 쓴 글이다. 뭐라는 건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제목도 촌스럽다. 내가 썼다고 말하기 참 부끄럽다.


내가 쓴 글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이 아니라면 이런 가정도 할 수 있다. 어떤 구절에 힌트를 얻어 내가 앞뒤로 살을 붙였을 가능성. 전체를 표절한 건 아니지만 중간 일부를 따와서 글을 이어 붙이고 덮어둔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흐르면 마치 내가 쓴 글로 착각할 수도 있다.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글을 발표하고 논란이 일면 미필적 고의 표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헷갈릴 때는 아예 발표조차 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유희열 씨 사과문 중 “긴 시간 가장 영향받고 존경하는 뮤지션이기에 무의식중에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됐고 발표 당시 나의 순수 창작물로 생각했지만 두 곡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는 부분이 이해가 된다. 물론 잘했다는 건 아니고, 옹호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순간 떠오르는 문장 또는 음 들이 내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는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소설가 신경숙 씨(왼쪽), 고故 김지하 시인(오른쪽)                            출처: 매일경제


물론 소설가 신경숙 씨 표절 논란을 보면, 아예 그대로 베껴 쓴 수준이다. 확실히 표절이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시인 故 김지하 선생이 쓴 <타는 목마름으로>도 표절한 시다. 시대를 향한 울부짖음이었기에 운 좋게 한동안 표절 논란에서 자유로웠다. 유희열 씨가 표절했다고 전해진 곡의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최근 유희열 씨의 곡이 유사성이 있으나 표절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표절 논란에서 자유로워진 걸까?



창작과 표절의 경계가 모호한 이유는 교집합 공간이 있어서이다.  교집합은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한다. 첫째는 ‘참고. 참고는 출처를 밝히지 못한 실수로 가장할  있어 그럴듯한 변명이   있지만 ‘참고라는 단어가 ‘펴서 도움이 될 만한 재료로 삼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의성 의혹은 떨칠  없다.


둘째는 ‘모방’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유명한 경구가 모방을 부추기는 느낌도 든다. 창조의 어머니가 될 수는 있어도 윤리적 도의적 문제가 많은 어머니 논란은 피할 수 없다.


셋째는 '유사성'이다. 유사성은 논란 대상자가 할 수 있는 최후 변명이고 표절은 원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참고’라는 고의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방’이라는 윤리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유희열 씨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본인이 직접 두 곡의 유사성을 말했으나 원작자는 표절이 아니라고 했으니 표절 논란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표절이든 아니든 대중 또한 유희열 씨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표절은, 그 논란 자체에 휘말리는 것은, 

그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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