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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Quinn Jul 31. 2022

[서평] 캔터베리 이야기(하)


최근 존 윌리엄스가 쓴 <스토너>를 읽었다. 주인공 스토너가 문학을 공부하며 봤던 작품이 <캔터베리 이야기>였다. 그 부분을 가감 없이 인용한다. “그(스토너)는 1915년 봄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여름 동안 논문을 완성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중 한 편을 택해서 작시법을 다룬 논문이었다.”에서 보듯이 <캔터베리 이야기>는 각 편 이야기보다는 작시법 특히 운문법으로 유명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시각으로 시신경을 자극하기보다는 청각으로 뇌를 자극하는 소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책 이야기가 이렇고 저렇고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영어 원서를 보며 귀를 만족시키는 법을 모르니 ‘이야기’에 의존하여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겠다.


<캔터베리 이야기>(상)권에 이어서 (하)권 이야기들 역시 흥미롭다. 첫 번째 ‘의사의 이야기’부터 짧고 굵게 끊어치듯 독자를 매질한다. 죄의 결과가 어떤지 알려주고자 아름답고 고귀한 한 여성을 참혹한 죽음에 내몰았다. 그 충격이 만만치 않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면죄부 판매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종교를 이용하고 있는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악한 종교인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 비판은 예부터 현재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비판이다.


<멜리비 이야기>는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되어 있는데 읽다 보면 기시미 이치로가 쓴 <미움받을 용기>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 부분이 유일하게 산문이어서 그럴 수 있고, 다루는 내용 자체도 철학적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기도 하다. 이 부분이 산문인 이유를 내용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내용이 형식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처럼 보이도록 많은 장치들을 해놨지만 진실이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아피우스가 그의 이름인데, 이는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분명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진실임을 선포합니다.”라는 문장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며 실제 사건인지 검색해 볼 수는 있지만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까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책 속으로 두 눈과 신경을 흡입하게 하는 그 ‘힘’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고 이 책 <캔터베리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이 책에서 세네카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마침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책 <철학자의 위로>가 있으니 가지 뻗듯 읽으면 나무 한켠에 작은 열매 하나 맺을 수 있겠다. 청각을 만족시키려면 당연히 원어를 들어야 한다. 다행히 YOUTUBE에 [THE CANTERBURY TALES by Geoffrey Chaucer - FULL AudioBook | Part 1 of 2 | Greatest AudioBooks]이 있다. 무려 10시간이 넘는다. 다 듣는 건 말도 안 되고, 중간 한 파트만 들어도 좋겠다. 그러나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의 차이, 지역별 억양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마저도 완벽한 복원은 아니다. 이 원어를 들으며 또르르 굴러가는 듯한 ryhme을 느끼는 것도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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