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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Quinn Aug 01. 2022

[서평]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클래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도 한 번 들어봐야겠다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 책이 그 마음에 동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겠다. 책 제목도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이지 않은가.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인포메이션 센터( i ) 가장 앞쪽에 꽂힌 관광 안내서가 되어 줄 책이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본 사람은 안다. 첫 여행에는 안내서가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여행 내내 필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특히 같은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한 사람은 안내서가 모든 걸 담아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더는 찾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중이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클래식이 가진 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능, 인류애적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녹여냈다.

2. 그래서 위대한 클래식을 켠다는 것은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만이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정신적 가치를 지키고 그것을 이루려 했던 위대한 선인들의 호흡을 가까이서 접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대중의 클래식화化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클래식을 “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을 아름답게 그려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 어원이 “가치가 불변하고 영구적이며,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품위가 있으며, 절제되고 모범적인”이라는 뜻이라고 해서 클래식이 최상위 음악이라고 한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클래식이 교양의 상징이고 모든 예술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한다는 저자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클래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클래식 듣는 사람들이 교양 있고 기품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트로트를 들으며 감동을 받고 마음에 울림을 얻는 사람이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감상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악은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지는데 그 음악이 꼭 클래식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또한 교양은 클래식 음악을 많이 알고 듣는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음악회에 가서 핸드폰 불빛을 발사하지 않고 사진 찍지 않으며, 코를 골며 자지 않고 손뼉 칠 때 함께 손뼉 치고 침묵할 때 같이 침묵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양이다. 사실 이건 어느 곳에서나 지켜야 할 에티켓이고 매너다. '교양'이라는 것은 독일어의 '빌둥Bildung(인간 형성)'을 번역한 말이다. 그 당시에 “스스로 독서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품위(인격)를 내면으로부터 고양하고 균형 잡힌 이해력을 익히는 것을 의미”(<독서와 일본인>에서 발췌) 했다. 그러니까 교양은 특정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 인격을 내면으로부터 ‘고양’하고 ‘균형’ 잡힌 이해력을 익히는 것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클래식은 어떻게 나를 성장시킬까요? 클래식 음악은 우리가 발을 담그고 있는 이 번잡한 세상과 나를 유리시켜줍니다. 분리해 주고 차단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나를 남과 비교하지 않게 하고, 남의 기준에 나를 적용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힘을 줍니다. 클래식을 듣는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부터 벗어나서 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클래식을 듣는 행위는 대단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무기 속에서 우리는 성장합니다.”(39쪽)


단어 ‘클래식’에 독서가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트로트도 마찬가지고, 운동이나 명상, 커피 등도 당연히 해당된다. 음악에 우위는 없다. 취향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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