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면이 되고
초등학교 입학부터 스무 살까지 파주에서 모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이 만들어진 곳이었고,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후에도 한 달에 2번씩은 꼭 파주에 갔다. 대중교통을 타면 편도로만 2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열심히 파주로 돌아갔을까. 가족이 있어서? 가족은 나의 대학 진학 후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친구들이 있어서? 정답이 될 수 있겠다. 사실 파주로 가봤자 친구들밖에 안 봤으니 이유의 대부분이겠다. 그런데 서울에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겨우 술 마시려고? 다소 의문이 든다. 나는 왜 그랬을까.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싸운 날이 있었다. '나는 항상 파주까지 갔는데 너희는 왜 서울에 안 오냐.'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친구는 거기까지 갈 엄두가 잘 안 난다고 대답했다. '그럼 거기까지 간 나는 뭐냐.'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네가 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들었던 말은 핑계나 변명일까? 졸업 후에 철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힘든 시간이 있었다. 나를 빼고 친구들이 노는 모습은 내가 원래 있던 곳과 멀어졌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각인시켰다. 그런데 사실 특별히 먼 곳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파주까지는 차로 두 시간, 서울까지는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파주와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면서 정작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전보다도 가까운 거린데 나는 왜 그랬을까.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르는 길을 찾을 때 우리는 지도 어플을 켠다. 목적지를 검색하고 '길 찾기' 버튼을 누르면 선으로 표현된 길이 나타난다. 목적지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계산하여 경로를 보여준다. 우리는 처음 보는 길을 핸드폰에 그려진 그대로 걷는다. 선 위를 걷는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끝이다. 우리의 눈이 아닌 지도 속의 선이 우리를 목적지로 이끈다.
우리는 이처럼 흔히 공간과 공간을 선으로 잇는다. 네트워크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지하철 두정거장을 가면 된다거나, 두 블록 앞으로 가면 된다거나. 우리는 길의 옆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지도를 다시 보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우리가 있을 뿐, 우리는 외나무다리를 밟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옆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길들이 있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의 출근길이나, 언제나 5분씩 모자란 등굣길. 우리는 대부분의 하루에 같은 길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 날 나의 길이 된다. 그때 길은 선이 아니게 된다. 지도가 아닌 기억과 감각이 우리를 이끈다. 우리의 시선이 발자국을 떠나 주변 공간을 인식한다. 선은 면이 된다. 그 순간 우리가 걷는 길에는 이야기가 생긴다.
이야기가 생긴 길에는 지루한 편안함이 있다. 불편함은 익숙해지고 새로움은 줄어들게 된다. 하루에 세 번 밥을 먹듯이, 우리는 그 공간을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어디쯤에서 강북으로 건너간다거나, 어떤 시간대에 같은 학교 학생들이 있다거나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지하철에서 창밖으로 반짝이는 한강이 보이고 등굣길에 같이 뛰어가는 친구가 보인다.
파주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는 항상 영등포를 가게 된다. 그곳에는 전 날의 숙취 해소를 위해 자주 가던 프랜차이즈 식당이 있다. 버스를 타고 영등포에서 내리면 안 그래도 불편한 속이 뒤집혀 버린다. 그렇게 좀비처럼 길을 걷다 보니 시선에 들어오는 곳이었을 뿐이다. 환승을 하기 위해 길을 걷던 내가 어느 날 문득 들어갔을 뿐이다.
유명 연예인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광고판은 정감을 주지 못한다. 주인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곳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한 끼를 해결했을 뿐이다. 인테리어는 촌스럽고, 대단히 맛있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곳에 들러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내 일상적인 복귀 길이었다. 단골이라기에는 맘에 안 드는 곳이었지만 그곳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을 어쩌랴
오랜만에 파주를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에 학교에서 약속이 있어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항상 타던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쯤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영등포에 도착해있다. 특별히 좋지도 않은 곳에서, 오랜만에 온 서울에서 먹는다는 게 겨우 프랜차이즈라니.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보며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지루하게 달려왔다.
약속을 마치고 다시 철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커튼을 치고 귀에서 이어폰을 빼뒀다. 언제 도착하나 지도를 쳐다봤다. 그날 하루는 이 한 시간 반짜리 버스 하나만으로도 '다시 철원으로 가는 날'이었다. 파주에서 돌아온 시간은 두 시간 반인데 왜 '파주에서 서울 가는 날'이 아니었을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지금 순간도, 철원에서 서울로 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