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커져버린 5살 소년

W

by pq

글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상당 내용은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각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두 분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합니다!'


유난히 춥던 1월 저녁.

데이팅 앱(Dating app)에서 '그린 라이트'가 떴다.


그의 이름은 W.

사진 속 W는 키는 좀 작은 듯 하지만 인상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혼 경험이 있다.

나도 이혼했는 데 뭐.

자식은 없다.


취미는 비디오 게임.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은 만나봐야 아는 거랬다.


'오랜만에 데이팅 앱을 깔고 들어갔는데 바로 매칭이 되다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데?'


이 데이팅 앱에는 규칙이 하나 있다.

남녀가 서로 매칭이 되었을 때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쪽지로 말을 걸어야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만약 여성이 말을 걸지 않으면, 둘이 짝을 이루었다고 해도 영영 대화는 나눌 수 없게 된다.


"안녕 W, 나는 애니라고 해. 여기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


"안녕 애니! 난 네가 연락이 없길래, 내 존재를 잊고 있는 줄 알았어. 하하. 나는 방금 저녁 먹고, TV 보고, 이제 침대에 누워 쉬고 있어."


W는 미국 육군이었다.

한국에 온 지 약 6개월 됐는데 곧 승진을 앞두고 있어서 이발소에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축하해 줬다.


"혹시 내일 뭐 하니? 특별한 일 있어? 시간 되면 만나서 점심이나 커피 마시지 않을래?"


W가 급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내일 일이 있어서 미군 부대에 가긴 하는데... 일 끝나면 4시에서 6시까지 시간이 비어. 6시부터 7시까지 또 모임이 있어. 7시 이후에 만나는 건 너무 늦을 것 같으니... 4시에서 6시 사이에 만나 커피 마시자."


나는 처음부터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볍게 커피나 한 잔 하면서 W라는 남성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W는 자신의 차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며 저녁 8시에 만나 저녁을 먹자고 했다. W는 심지어 4시에 약속이 끝나는 장소에서 6시 모임 장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극구 거절했다.


깜빡이 없이 직진으로 들어오는 그의 적극성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어차피 만날 거, 질질 끌어봤자 좋을 거 없다, 차라리 잘됐다, 부딪쳐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만나서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데, 여기서도 W와 나의 성격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사실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미식가도 아니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음식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냥 끼니를 때우고 배만 부르면 된다. 분위기 좋은 카페나 예쁘게 꾸며진 레스토랑은 좋기는 하지만, 사실 같이 가는 사람과 먹으며 대화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유명하고 시끄러운 곳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 좋다. 무엇을 먹든.


W는 저녁 메뉴를 고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미군 부대 안에 있는 스테이크 레스토랑을 이야기하더니, 얼마 전 그곳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사실 자주 간다고 했다. 그러더니 '용기 내서 새로운 한국 음식을 시도해 보지 않겠니?'라고 물었다.

W에게나 '용기 내서' 시도하는 '새로운' 한국 음식이지, 나에게는 그저 익숙한 음식이건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W는 다시 자신은 해산물을 싫어한다면서 한국 음식에 들어가 있는 해산물은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찝찝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해산물을 먹으러 가면, 내가 해산물의 정체를 알려줄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것 같다고도 했다.


W는 또 공간도 매우 중요시했다.

뷰도 좋아야 하고, 조용해야 하고, 사람들이 많지 않아야 하고, 복잡하면 안 되고, 우리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는 곳이어야 된다고 했다.


또한 자신은 지금 다이어트 중이기 때문에 살찌는 음식은 제외시켜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이 이야기 한 모든 조건을 갖춘 음식점을 찾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내가 제안을 했다.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까 무리하지 말자. 네가 즐겨 먹는 곳으로 가자.'


W는 자신이 아는 한국 음식점은 미군 부대 내에 있는 한식당 한 곳뿐이라고 했고, 나는 꼭 한식이 아니어도 된다고 했지만, 결국 우리는 미군 부대 안에 있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정했다. W는 매우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널 만난 적도 없는데 나는 너를 오늘 하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어! 만약 우리 관계가 발전된다면, 나는 한국에서의 근무를 1년 반 더 연장할 수도 있어. 네가 미국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 바로 미국으로 들어가도 돼.'


나는 진지한 관계로 이어지기 전에 먼저 몇 년 만나보고 이야기도 많이 나눠보고,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두르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W 다시 한번 내게 물어왔다.


"네가 괜찮다면 내일 오후 4시에 만나서 먼저 차를 마시고, 다시 8시에 만나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건 어때?"


나는 그건 좀 피곤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만나기로 한 내일이 왔다.

1월 저녁, 바닥은 얼어 빙판길이었다. 나는 검은색 원피스에 검정 스타킹을 신고, 베이지색 패딩코트를 걸쳤다. 미군 부대에서 볼 일을 마치고 건물 밖을 나서는데, 앞 전등을 환하게 비추고 서 있는 하얀색 BMW SUV차량 한 대가 보였다. 혹시 W인가 싶어 눈이 부시는 전등 빛을 손으로 막으며 차량 앞으로 다가가는데 W가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한다.


그의 첫인상은, 뭐랄까...

5살짜리 소년이 그대로 몸만 커져버린 느낌?


W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hun~(자기야)'라고 부르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조금은 어색한 나와 많이 신나 보이는 W와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미군 부대 안 한식당에 들어서니 한가했다.

W는 비빔밥을 시켰고, 나는 갈비탕을 시켰다. W가 이 집 갈비탕이 정말 맛있다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나는 W와 저녁을 먹으며 W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W는 30대 후반의 미국인이다.

어릴 적 미혼모 밑에서 자랐으며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생활고로 힘들어하던 엄마는 W를 위탁시설에 보냈다. 그렇게 W는 형제도 부모도 없이 위탁시설을 옮겨 다니며 어린 시설을 외롭게 보냈다. 그러다 미군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입대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W는 약 20년 간 미군에 젊음을 바쳤다.


W에게는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의 경험도 있다.

첫 번째 여성은 미국에서 철없던 시절, 첫사랑과 한 결혼이라고 했다. 그 여성은 W가 이라크와 같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고 했다.


두 번째 여성은 이집트 여성이었는데,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여성이 마약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혼을 했다.


세 번째 여성은 변호사였는데, W가 한국으로 온 이후 그 여성의 의부증이 심해져서 최근 이혼했다고 한다.


W는 자식이 없는데, 그 이유는 정관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워낙 아이를 키우는 비용도 비싸고 아직까지 아이를 함께 키우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에는 자신의 명의로 된 집 한 채가 있으며, 캠핑카도 있다. 한국에서 몰고 있는 BMW SUV차량과 더불어 미국에도 BMW 한 채가 더 있다고 했다. W는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수 있어'라며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W는 종종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날리고는 했는데 그중에는,


"네가 왜 이렇게 반짝거리는 거지? 그 이유가 네 위의 전등이라면, 저 전등을 떼어가겠어."


"손이 정말 예쁜데 뭔가 허전하네. 아! 다이아몬드가 없구나. 걱정 마, 내가 곧 손가락에 약혼반지를 끼워줄게."


"앞으로 돈을 많이 모아야겠어.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여자친구랑 미국여행을 하려면 말이지."


W의 재밌지도 않고 어색하기만 한 말재간에 나는 그저 '허허'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종업원이 손님이 먹고 떠난 자리를 치우는 과정에서 빈 맥주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병이 깨진 것이다. 당황하는 종업원에게 나는 '괜찮냐'라고 묻는데 W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신 때문에 우리 데이트 분위기가 안 좋아졌잖아요!"


'죄송하다'라고 연신 말하는 종업원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W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상대의 인성을 볼 때, 그 사람이 식당 종업원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라고.


이후 나는 빨리 이 저녁식사가 마무리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W의 생각은 달랐다. 음식점이 문을 닫으려 하자 '다음에 어디 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내일 아침 일이 있어서 집에 가야 한다고 하니 '이렇게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다'며 '네 집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건 어때?'라고 제안을 했다. 나는 '집에 낯선 남자는 들이지 않는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W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딱 한 시간만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W는 집에 들리기 전 미군 부대 내 편의점에서 맥주와 조화다발을 샀다. W가 다발을 불쑥 나에게 내밀기에 나는 자동적으로 냄새를 맡았는데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제야 조화인 줄 알았다.


"어머~ 이렇게 생화 같은 조화는 처음 봐."


그러자 W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조화였어? 내가 지금 가짜꽃을 45불이나 주고 산 거야? 완전 사기꾼들이네."


성격도 급하고 다혈질이다.

조화도 예쁘다고 나름 W를 달래며 W의 집으로 향했다.


W집에는 기본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 혼자 사는 냄새가 났고, 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뒤 식탁에 앉았다. W는 맥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물을 마시며 게임을 시작했다. 그냥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커플들을 위한 질문게임이다. 질문하고 답하고 그렇게 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W는 맥주 6병째 들이키는 중이었다.


결국 1시간이 지나고 나는 집에 가겠다고 했다. W는 자신의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요즘 연초라서 음주운전 단속 많이 해. 너 걸리면 미군에서 승진한 것도 무산될 텐데 괜찮겠어?"


W는 그제야 나를 고이 택시에 태워 보내줬다.


드디어 해방이다.

W와의 만남은.. 피곤했다.

안 맞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게 이토록 에너지 소모되는 일인지 몸소 느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W와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데이트를 마치고 다음 날.

W는 나에게 문자로 연신 '자기야~'와 하트를 날렸다.

그래서 나는 W에게 명확히,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오전 10:01

'생각해 봤는데, 우리 둘은 아닌 것 같아. 너는 정말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야. 어제저녁에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다만 너는 나와 맞는 사람이 아니야. 미안해.'


그때부터였다.

W의 문자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오전 10:04 '

"내가 정말 훌륭하지만 나와 함께하긴 싫다?" 하하'


오전 10:06

'우리는 정말 잘 어울리는데 너 때문에 난 다른 사람을 또 찾아 헤매야 해... 또 기다려야 한다고...'


오전 10:07

'너는 공짜로 저녁을 얻어먹기 위해 나를 이용한 거야! 아주 잘하는 짓이다!'


오후 16:06

'너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너는 나쁜 일이 생겨도 싸. 넌 더 당해봐야 해.'


오후 16:08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네 외모 별로였어. 난 단지 네 성격만 본 거였다고. 그런데 성격도 별로네. 너를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퇴짜를 놓아? FUCK YOU! 왜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파!'


다음날,


오후 16:04

'아니, 난 너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겠어. 너도 알잖아. 우리는 운명의 짝이라는 것을.'


역시, W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5살짜리 소년이 그대로 몸집만 커져버린 듯한 느낌.


W를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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