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팅 앱에서 남녀가 서로 마음에 들어 연결이 된다고 해도, 그 관계가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어질 확률은 매우 낮다. 대부분 온라인 채팅으로 대화 몇 번 주고받다가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며, 또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에 대해 극명하게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하고 '우리는 안 되겠네요'하고 연결을 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이번에 연결된 남성은 M이었다.
10년 넘게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데, M의 소개란에는 세계 곳곳에서 찍은 흥미로운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찍은 사진.
어느 인디언 부족과 찍은 사진.
나룻배에 몸을 싣고 강을 건너는 사진.
사막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품에 안고 찍은 사진 등, 그의 삶은 다채로워 보였다.
'한국에 몇 달간 머물 예정입니다. 한국에서 여자친구, 더 나아가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그게 당신이 아니라면 친구로라도 남지않겠어요?'
M은 30대 후반의 뉴욕에서 온 미국인이고 엄청난 야구팬이다. 외모는 아담 샌들러 느낌이 난다.
나는 무엇보다 M이 어떻게 일도 안 하면서 10년 동안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이 궁금했다.
M에게 쪽지를 보냈다.
'너는 내 꿈을 실천하고 있구나!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방법을 알려줘!'
M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와 함께 꿈을 실천해 보지 그래? 그러면 어떻게 가능한지 내가 모든 비밀을 알려줄게.'
정말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당기는 제안이긴 한데... 나에게는 고양이 2마리가 있어. 그래서 당장은 안돼. 나이 들고 은퇴하면, 그때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 그런데 너는 정착은 안 할 거니? 언제까지 여행할 거야?'
M은 나에게 농담과 함께 조언을 던졌다.
'나도 언젠가 정착을 하겠지. 아마도 내 아이가 5살이 되어서 학교에 들어갈 때쯤 정착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고, 내 예쁜 아이를 낳아 줄 아름다운 여성은 고양이 2마리 때문에방금 나를 거절했어... '
'꿈을 이루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리지는 마. 은퇴한 사람들은여행하면서 암벽을 타거나, 별빛 아래에서 캠핑을 하거나, 상어와 헤엄 치는 경험을 못하거든."
M은 돌아오는 주말에 곧바로 제주도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불쑥 함께 제주도로 가자고 했다. 나는 직장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M은 토요일과 일요일만이라도 함께 가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지만, 우리는 금요일 오후에 만나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합의했다.
정말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하얀색 나시 원피스를 입은 내 몸은 온통 땀으로 뒤덮여 끈적였다. 하필 M을 만나기로 한 시간도 오후 3시, 한참 뜨거울 때였다.
M은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경복궁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미 한 시간 정도 늦은 나를 M은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경복궁 근처 여러 커피숍 가운데 M이 있는 커피숍을 찾기 위해 연신 땀을 쏟아냈다.
장정 3시간 끝에 커피숍 2층에 앉아있는 M을 발견했다.
"나 녹아버릴 것 같아"
M을 보자마자 인사도 생략한 채 불쑥 탄식이터져 나왔다.
M에게 음료수는 시켰냐고 물어봤더니, 들고 있던 물병을 들며, '음료수는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도 숙소가 있는 이태원에서 경복궁까지 2시간 넘게 걸어왔다고 했다.
이 땡볕에.
그런데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이 더운 날씨로 인해 취소됐다는 것이다. M은 매우 실망이 컸다.
M은 사진보다 살이 조금 더 쪄 보이고 나이도 좀 더 들어 보였다.
우리 모두 가장 자신이 예뻤을 때, 잘 생겼을 때의 모습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고는 하니, 이해는 한다.
"우리 어디 갈까?"
내가 묻자, M은 자신의 숙소가 있는 이태원으로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슬슬 걸어가면 저녁시간 때쯤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귀를 의심했다.
'다시 이 땡볕 속을 걷는다고? 또 3시간 동안?'
M은 자신이 배낭여행 중이기에 대중교통을 포함해 최소한의 비용을 지출한다고 했다.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더우면 카페에 들어가 에어컨을 쬐고,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마신다고 했다. 밥은 사람들한테 얻어먹는다고 했다.
경복궁에서 이태원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걸어갈 각오를 하기 위해 나는 1미터짜리 생수를 구입했다. 그리고 우리 둘의 행진은 시작됐다.조금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지만 버틸만했다.
나는 M과 걸으면서 M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M은 미국에서 일을 하며 매달 집세와 공과금, 세금을 내며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사를 하고 한 달간 해외에 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있단다.
해외 배낭여행 한 달 비용이, 뉴욕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보다 적게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이후 M은 다시 직장에 들어가 1년 동안 열심히 여행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1년이 되던 날, 직장을 관두고 무기한의 세계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1년 동안 모은 돈은 결국 1년 반 만에 동이 났지만, 그때부터 M은 여기저기 각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잡일을 하며 여행을 이어갔다.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100개국이 넘는 곳을 다녔다. 한국은 이번이 처음이다.
M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기계치라는 것이다. 그 수많은 곳을 10여 년에 걸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건만, 기계치라는 이유로 영상이든, 사진이든, 제대로 기록된 것이 없다. 사진을 저장해 놓은 하드 디스크가 사라지고 영상은 찍으면 녹화버튼을 누르는 것을 깜빡하기 일쑤란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언을 해줬지만 M은 자신은 틀렸다며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파트너로 필요하 댔다.
우리는 이태원 삼각지역 근처에 있는 부대찌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허겁지겁 먹는 M의 모습이 괜히 짠했다. 계산은 당연한 듯 내가 했다.
한때 '세상을 배우기 위해 무일푼으로 세계여행에 나섰다'며 세계 곳곳에서 여행자금을 기부해 달라는 간판을 들고 호소하는 미국 청년들의 모습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