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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Aug 25. 2023

결기,라는 말


며칠 전 후배를 만났습니다. “00가 결기가 있어야지요.“ 결기, 말하면서 쓰거나 흔히 듣지 못하는 말입니다. 사전을 찾으니 결기는 ‘못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고 발끈 성을 내거나 왈칵 행동하는 성미‘, ’바르고 결단성 있게 행동하는 성미‘라고 써 있습니다. 기개나 결기라는 단어를 글로 쓴 적은 있지만 대화 속에서 말로 들으니 새삼스러웠습니다. 후배가 건넨 말에 담긴 말간 기운이 좋았습니다.


후배도 어느 덧 책임지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참고 견디고 버티면서 땀과 눈물로 벼린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자리는 기회이자 위기입니다. 마땅한 사람이라면 기회겠지만 거품이 꼈다면 위기가 올껍니다. 맞지 않는 자리에서 본인뿐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마저 망가지는 걸 숱하게 봤습니다. 후배는, 아직까지는 다행이었습니다.





후배를 만나고 나서 비슷한 인물이 떠 올랐습니다. 2000년대 초반 영국 토니 블레어 수상 시절에 교육부 장관, 에스텔 모리스(Estelle Morris), 그녀는 교사를 하다가 정치에 뛰어 들었고 영국 버밍햄 (Birmingham) 지역구 하원 의원을 지냈습니다. 2002년 10월, 그녀는 장관 재임 1년 6개월 만에 갑작스레 사임을 합니다. 그녀가 총리와 독대한 후 총리에게 보낸 사직서 내용은 이렇습니다. 


“친애하는 토니, 지난 1년 6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무엇을 잘하고 또 무엇을 못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저는 주어진 문제를 처리하고 일선 교사들과 소통은 비교적 잘 해온 편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정부에서 교육부가 추진해야 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운영은 잘 못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장관으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적 능력이 아주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는 총리가 원하는 만큼 능률적이지도 못합니다. 당신은 친절하게도 하루만 더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여기서, 제가 해야 할 가장 좋은 선택은 이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후배가 말한 결기도, 자리를 끝까지 지키겠다는게 아니라 언제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수 있고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배에게 들은 ‘결기’라는 말이 며칠이나 쟁쟁거립니다. 인간다운 품위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겪을 필요 없는 시행 착오를 겪지 않도록,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얼 빠지지 않도록, 함께 분별하고 서로를 힘써 지키는 관계를 갖는 것, 나이들수록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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