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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Jun 17. 2021

에세이의 홍수

말은 글이 아니다

책은 읽는 게 아니라 사는 거다,라고 말하며 돌아다닌다. Photo by Sharon McCutcheon



읽다만 책들이 수두룩하다. 난독증이라 할만큼 책을 못 읽었다, 읽기 싫었다. 시는 그럭저럭, 소설 역시, 지적 체력을 요하는 책들이 되려 생각을 말갛게 해 편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쉼은 언제나 에세이(산문)다. 수필,이라 번역하고 특정 장르라 하기엔 천대받았던 글쓰기, 하지만 요즘 에세이가 홍수다. 소설가, 시인, 명사들이 앞을 다퉈 산문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고 있다. 글과 말의 분명한 차이, 하지만 그 경계가 무너지고 불분명해지고 있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글은 글이고 말은 말이다. 말과 글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산문은 알록달록하다. 삶의 결만큼 다채롭다. 분량은 딱 한 호흡이거나 숨찰만큼 긴 것도 있다. 사사로운 감정이 묻어나고 지난 자취가 그려진다. 사적 관계가 드러나고 사건, 사고가 펼쳐진다. 개인사에 얽힌 역사의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은 '쨍'하다. 소설과의 경계가 모호한 산문이 있고 시인 자신을 닮은 것도 있다. 자신의 주특기보다 산문(집)에서 다른 차원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 흐트러지고 허물어진 삶의 자투리가 작가의 속살을 드러낸다. 어떤 글쟁이에게 산문은 피난처다. 딴짓이 빛을 발하는 순간, 작가에게도 피신할 곳이 필요하다.


문투는 문장을 그러모은다고 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Photo by Marcus Ganahl



반짝이는 산문을 쓰는 이가 있다. 자신만의 문체(style)가 드러나는 글, 어떤 이들은 소설이나 시를 쓸 때보다, 자신이 오래 몸 담았던 분야에 대해 쓰기보다, 취미로, 흥미로, 그저 관심 가지고 오랜 세월 가다듬었던 분야에 대해 쓸 때, 빛을 뿜는 이들이 있다. 영화 기자 김혜리가 쓴 그림 산문집이 그렇고, 연극 평론가 안치운이 옛길 걸으며 쓴 글이 그렇고,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쓴 <밤이 선생이다> 2부에서 사진과 곁들인 산문(사진 에세이)이 그렇다.(목록은 끝이 없다) 문체는 곧 문투(文套)다.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호흡있는 글이 될텐데 문투는 문장이 모인다고 절로 생기지 않는다.


논리적인데다 주장이 명백하게 드러난 좋은 글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로고스적이기보다 미토스적이고 파토스적인 글에 홀린다. 정찬 선생이 최근에 묶어 낸 산문집이 그랬다. 이야기라는 구조와 형식 속에서 빛을 발했던 사유를 묶어 놓으니 맥이 빠지고 빛이 바랬다.(물론 기본 이상이다, 오해 없길) 문체는 사유의 결과(표현)이기도 하지만, 존재의 속살이 드러나는 창이다. 산문 속에는 '개인성'이라는 사사로움이 슬쩍쓸쩍 흘러나올 때 향기롭다. 산문을 읽는 이유가 거기 있다. 젠체 할순 있어도 문투는 흉내내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투는 작가 자신이다.


말은 글이 아니다. Photo by James Orr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마저 연출(작가적 필력)이 돋보이는 것도 별로다. 자신을 허물거나 자신의 뒤를 응시하는 것이 뭉클하다. 산문에는 작가의 소설과 시 혹은 그의 예술과 작업이 도달한 어떤 차원이 슬며시 도드라지기도 한다. 없는 걸 있다고 할 순 없다. 존재의 가벼움은 문투를 낳지 못한다. 사유의 독창성이 삶의 보편성 속에서 진위의 시험을 거칠 때 문투는 피어난다. 관념의 특이성만으로 고유한 문투를 길어 올린 순 없다. 문투는 삶의 무늬일테고 삶은 사유의 처절한 시험대일테니까. 헛헛한 산문들이 넘쳐난다. 춤을 추지만 흥이 나지 않는다. 글이 말에 가까워 지는 것은 긍정적이나 말과 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말은 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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