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시인

<북치는 소년>(김종삼, 민음사, 1979)

by 기성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墨畵) 전문, <북치는 소년>, 민음사, 1979)


어릴적 시골 큰집에도 외양간과 소가 있었다. 큰 아버지나 큰 어머니의 새벽 첫 일은 가족들의 밥 짓기가 아니라, 가족보다 더한 소밥(여물) 삶는 일이었다. 가마솥 가득히 넘쳐나는 여물과 여물통에 퍼다나른 여물에서 피어오르던 새하얀 수증기가 떠오른다. 겨울이면 헌 이불 누벼서 소 등에 덮을 이불을 만들었다. 이불 가장자리에 두꺼운 천을 덧대 꽤 튼튼하고 야무지게 만들었다. 그 시절 소는 자식이었고 피붙이였다. 나머지 자식들 공부와 출세시키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묵묵한 맏형이었다.


"시편 속의 소는 무채색의 소처럼 보인다. 하루 노동을 마친 소가 어둠 속에 서서 물을 먹고 있다. 그 곁에 할머니가 서 있다. 소와 할머니 사이에 적막이 흐른다. 할머니가 물먹는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다. 손길에서 치성致誠이 느껴진다. 할머니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소가 물을 먹는다. 노동에 지쳐 부어오른 소 발등을 본다. 마찬가지로 부어오른 자신의 발을 본다. 할머니는 부어오른 소의 발등이 못내 안쓰럽다. 안쓰러움이 어둠 속을 떠다닌다. 시인은 기어이 그 안쓰러움의 세목을 어둠 속에서 불러올 모양이다. 어둠 속으로 시인이 손을 내민다. 시인의 손길에 소가 불려나온다. 할머니도 불려나온다. 어둠도 불려나온다. 시편 안으로 들어온 소와 할머니와 밤이 재배치된다. 다시, 소리 내어 시를 읽어본다. 시 전편에 따듯한 기운이 맴돈다. 김종삼의 시 <묵화墨畵>는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윤리적으로 옳다. 시편 안에서 소와 할머니는 평화롭다. 소와 할머니에게 평화가 깃들길, 오늘 하루도 무사히! "(이 감상은 친하게 지내는 형의 감상을 따왔다)


김종삼 시인의 이 시집은 혼자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떠날 때 자주 지니고 다니며 읽는 시집이다. 헌책방에서 어렵사리 구한 저 판본은 볼수록 정감이 간다. 헤질대로 헤진 시집처럼 시간이 지나도 슴슴한 향이 오래도록 배나오는 시집, 이 시집에 담긴 김종삼의 시편들은 아름답다는 닳고 닳은 말의 뜻을 고즈넉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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