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은 어떤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다. 하여, 의문은 자신을 건 해석이다. 의문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질문은 의문이 신체를 빌어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다. 하여, 질문은 의지를 담아 자신을 던지는 행위이고, 그래서 질문엔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어린 질문은 그 자체로 영롱하다. 김안의 두 번째 시집엔 질문이 가득하다. 누구나 품어야 할 의문이지만, 누구도 쉬이 답할 수 없어 질문이 된다. 누구나 품었을 의문이지만, 누구도 던지지 않아 질문이 되었다. 꽤나 무겁고 아픈 시인의 질문이 거슬리지 않는다. 시인의 질문이 성가시지 않은 이유와 울림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시집간 진폭이 크다. 은밀한 곳, 신체에 대한 묘사가 많았던 (걸로 기억되는) 첫 시집 <오빠생각>의 김안은, 사춘기를 시금털털하게 지난 늦깎이 청년의 기록 같았다. 이리 삐쭉 저리 빼쭉 모난 듯 객기도 부리는 말의 상찬, 꽤나 인상적(인 시집)이었다. 두 번째 시집 <미제레레>는 다소 낯설다. 그간의 “소홀”에 대한 “치졸한 변명”이라는 시인의 고백은, “말의 관절”을 더디게 맞추던 시절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낯섦은 그 간극 때문 일 거라 미루어 짐작한다. “허허롭다는 감정”을 배운 청년은 어느덧 공화국의 “시민-시인”이 되었다. 헛헛한 시절이 시인을 질문케 한다. 시인이 던질 질문거리 가득한 세상은 우울하고 어둡다. 시인이 질문하고 질문 담긴 시집이 느는 세상엔 희망이 없다. 시가 사라지고, 시인이 불필요한 세상은 없을 테지만, 시인이 질문으로 아픈 세상은 제정신이 아닌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