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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Aug 13. 2022

정희진,이라는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전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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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참 많이 사줬다. 읽고 좋으면 주변에다 침을 튀기곤 했다. 읽던 좋은 책을 준 적이 없다. 거기에 담은 책 읽은 흔적은 공부한 흔적이기도 하니 꼭 새 책을 따로 새로 사서 주곤 했다. 새로운 저자를 발견해도 마찬가지였다. 독서 편력이 쌓이면서 책 선물하기가 더 어렵다. 책 선물은 의도를 담을 수밖에 없는 친밀하지만 위험하기까지 한 모험이다. 사람 저마다 삶의 정황이라는 게 제각각이고 삶-사연은 다를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의도를 담아 책 선물을 하기는 점점 어렵다. 괜히 읽지 않을 책을 선물하는 것도 그래서 최대한 그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고르고 선물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대담한 정치적 행위기도 하다. 같은 책이라도 오독은 불가피하다. 정답 없는 저마다의 독해가 가장 좋은 독서법이다. 읽는 이가 갑인 독서법, 그래야 함께 읽으면 얻는 게 있다. 독서가 사람을 바꿀까? 대화로 사람의 생각이 변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적이다. 읽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서로에게 영양가가 있으려면 읽기 애쓴 세월과 내공이 필요하다. 대개의 독서 모임이 친목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같이 읽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도 함께 읽고 서로 읽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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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역시 처음 그의 글을 접하고 푹 빠졌다. 글 찾아 읽기가 시작되었고 출력해서 읽고 곱씹기 시작했다. 주변에 정희진의 글에 대해 얘기하고 출력한 뭉치를 건네고 링크를 복사해서 보내기도 했다. 책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독서의 여정은 동행이 되기 시작했다. 한 저자의 책을 따르고 글을 따라다니는 것 역시 아이돌 가수 팬들의 덕질과 똑같다. 어느덧 중견 저자가 되고 일간지와 주간지 고정 필자가 되고 글을 묶어 책을 내면 사고 다음 책을 또 기다린다. 글에 빠지면 목소리를 듣고 싶어 지고 강연을 보러 간다. 정희진은 아직 목소리를 확인해보지 않은 유일한 저자다. 직접 강연을 들은 지인을 통해 들은 얘기는 있다. <혼자서 본 영화>는 취향이 겹치고 영화에 대한 관점이 엇 비슷하면서도 새로워서 실실 웃으며 읽었다. 주변에 참 많이도 선물한 책이다. <아주 친밀한 폭력>은 뼈 아프게 읽고 겨우 겨우 읽었다. 한 여자를 맞이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대한 되돌아봄과 새로운 시작을 뼈저리게 할 수 있는 책이었다. 신뢰하는 남자 사람 친구 지인들에게 조심스레 건네며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길 함께 애쓰자며 건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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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이 한참이던 때 청춘을 바쳐(?) 지나왔던 곳에서도 엇비슷한 사건이 터졌다. 안희정과 박원순의 사건과 몰락의 궤를 같이 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거쳐온 단체에 생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이 보인 무책임한 행동에 기운이 쪽 빠졌다. 중요한 순간과 찰나에 보여준 그들의 비겁함과 나약함,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놀랐고 슬펐다. 나를 스카우트했고 내가 장이었던 단체 탄생의 재정을 대던 이도 같은 구설수에 휘말렸다. 피해자들이 어떤 지점에서 경악하고 있는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듣는 과정에서 나도 아주 친밀한 폭력의 간접적인 당사자면서 많은 부분 수혜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사건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서글픔은 분노로, 분노는 이내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그 바닥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2년 정도 나를 돌아보고 나를 지우는 시간을 가졌다. 어렴풋이 알았지만 실감하진 못했던 대한민국 여성들이 평생 동안 일상적으로 겪는 폭력의 손꼽만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이라는 이유로 내가 누린 말도 안 되는 특권이 정말이지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희진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새삼 뼈저리게 다시 읽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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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4,5권이 8월 초에 동시에 나왔다. 5권으로 일단락을 지을 셈인가 보다. 5권은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을 묶었다. 4권은 <혼자서 본 영화> 이후 영화에 대한 두 번째 영화 관련 책인 셈이다. 정희진의 글을 처음 접한 이들이 어렵단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과 너무 많은 얘기를 해서 난삽하단다. 고스란히 정희진(의 글)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와 겹쳐서 새삼스럽다. 처음 접하면 낯설고 어려운 게 당연하다. 꾸준히 읽고 관련한 지식을 쌓아야 읽기 역시 깊어진다. 정희진은 현란하다. 그의 글 쓰며 사는 삶이 전방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학 연구가라는 삶의 자리가 워낙 사방으로부터 적대와 혐오의 표적이 되는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곳에서 모든 말로 싸움을 거는 데 뾰족한 수가 없다. 닥치는 대로 읽고 쓰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작은 연대를 지키기 위해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건 현실이 그런 깊이와 넓이를 빚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희진의 글에 담긴 사유의 깊이와 폭은 스스로의 노력에 더한 지랄 맞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두드려 맞으며 단련한 탓이다. 다른 삶이 다른 사유를 낳고 다른 시각을 만든다. 이젠 '생각이 삶을 빚는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생각이냐가 중요한데 대개 고쳐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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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2022년 8월 5일 초판 발행이라고 찍혔지만 7월 말에 책이 나왔다. 이번 여름에 두 권을 번갈아 읽고 있는데 거진 다 읽었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도 한 호흡을 매듭짓는 듯하다. 정희진의 글은 가볍게 읽기도 좋고 깊이 생각할 거리가 필요할 때 어디를 펴서 읽어도 좋다. 몇 권째를 꺼내 읽어도 좋고 반복해서 읽어도 좋고 읽을 때마다 새로워서 좋다. 금세 뼈 때리고 이내 심각해졌다가 금세 실실 웃게 만들면서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세다. 문장이 단단하고 경쾌한 것은 물론이고 해박하다. 작가 스스로가 전문가(specialist)가 이면서도 교양인(generalist)의 삶을 지향하기에 깊이 읽히면서도 가볍게 읽히기도 하는 마법을 부리는 글이다. 문장의 호흡이 가파르면서도 적당한 길이로 반복하면서 끌고 가니 알아듣기도 쉽다. 알아듣기 쉬운 글이 깊이를 놓치지 않기에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고 고민은 깊어진다. 정희진의 서평과 영화 읽기는 정희진을 알기 전부터 가졌던 내 생각과도 일치해 놀라기도 하고 반가웠다. 책이나 영화 줄거리를 요악하면서 쓰는 서평과 영화 평론을 제일 싫어했는데 똑같았다. 책이건 영화건 줄거리(정보)는 인터넷을 뒤지면 된다. 당신이 그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어떤 부분에서 뜨악했는지를 알고 싶지 정보나 요약을 바라는 게 아니란 말이다. 줄거리 요약은 읽지 않았거나 보지 않은 것 아니면 특별히 할 말이 없다는 증거다. 줄거리 요약은 지루한 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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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이 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글쓰기가 새로운 지점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변했으면 좋겠고 그의 글이 지금처럼 신선하고 읽을만했으면 좋겠다. 점점 식상해지는 시인의 시집과 소설가의 소설, 치열함이 사라진 감독의 영화를 떠나보내는 일은 서글프다. 권력화된 무지, 변해야 할 때를 놓치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추해지거나 헛수고 하는 이들을 지켜 보는 건 괴롭다. 하지만 모든 생명(력)의 순리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시점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스스로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엄결함도 간혹 보면 좋겠고 그 자리를 다른 이들이 새롭게 채울 수 있도록 마음 다해 자리를 내어주어도 좋겠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을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고 제일 좋은 건 죽을 때까지 생생함을 유지할 수 있는 활력과 필력을 지닌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정희진이 한없이 사려 깊은 가벼움을 잃지 않길, 정희진의 글이 무탈하고 건필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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