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성 Nov 06. 2022

박준상,이라는 철학자

<빈중심>(그린비, 2008)

1

박준상의 글은 성실해서 빈틈이 없다. 빈틈없다는 말은 무결하다는 뜻이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는 과정이, 글쓰기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현하는 듯 하다. 박준상은 일단 성실한 글 노동자다. 몸으로 글 쓰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의 글이 그래서 믿음직하다. 글쓰기가 노동이라지만 그는 억지로 마지못해 쓰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그가 글쓰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그의 글에 더 끌린다. 그는 '그저' 쓴다. 어떤 주제에 대해 그는 할 말이 있어서 쓴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이 알고 기대고 있는 철학자들의 입을 빌고 비틀어 쓴다. 딱 거기까지 쓴다. 아는 척(특히 학자연)하지 않고 부러 겸손을 떨지도 않는다. 아는 만큼 성실하게 끈질기다기보다 힘 닿는데까지 쓴다. 딱 그렇게 쓴다. 그의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다.




2

박준상의 공부 궤적도 흥미롭다. 그는 분석철학이 유행하던 시절, 철학을 잘 하려면 수학 잘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수학과에 입학했다. 수학과를 다니면서 부전공으로 철학을 했고 그 무렵 키에르케고르에 푹 빠져 지냈다. 졸업할 무렵 미학이 철학의 연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대학원은 미학과로 정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프랑스로 훌쩍 떠나 <파리 8대학>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논문 지도 아래 '모리스 블랑쇼'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끝낸다. 그 때 논문 보고자는 ‘장-뤽 낭시’다. 박준상은 레비나스에게 더 끌렸지만 랑시에르가 자신이 레비나스를 잘 모르니 다른 주제를 찾으면 어떻겠냐고해서 레비나스와 가장 친연성이 있는 블랑쇼를 선택했(다고 한)다. 우연과 끌림, 운을 따라 다녔다고 하는 그의 청년 시절은 철학과 교수가 되기 어려운 공부 궤적이다.


3

이 책은 고루 좋지만 백미는 2부다. 3개의 문제적 글, 2부 첫번째 글은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나르시스의 꿈>에 대한 비평적 해석을 곁들인 소논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김상봉이라는 선배 철학자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끈을 놓치 않으면서도 빈틈을 꼼꼼하게 헤집어 비평과 비판을 해낸다.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면서 존경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비판이다. 비판과 비평은 어느 정도 '살기(殺氣)'를 동반하기 마련이고 과도한 애정은 눈 앞을 흐리게도 만드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맑고 청량하다. 길고도 긴 글이 이렇게 차분할 수가 있다니 그에게는 작가의 피가 철철 흐르는 게 틀림없다. 논문의 형식과 외피를 두른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 과장하자면 마치 홀린듯 읽었다.


2부는 5•18 광주 사태를 통하고 빗대어 관념의 폭력성과 무기력함에 대해 절절하게 비판하고 반성한다. 학자적 양심 혹은 문제의식이 오롯하게 빛나는 글이다. 관심이 구체적 타자와 실증적 몸의 현실을 무시하고 건너뛸 때 한편으로 어떻게 무시무시한 폭력의 칼날이 될 수 있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두부도 자르지 못할 뭉툭한 칼이 되는지를 쓰고 있다. 뼈 아픈 글이고 혀를 깨물 듯 꼭꼭 씹고 소화시켜야 할 글이다.


책 마지막에 실린 글은 박준상 철학의 핵심이 담백하게 담긴 글이다. 손가락에 꼽을 만큼 사랑하는,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는 글 중 하나다. 박준상은 "언어로 가득찬 자궁이 있는 남자"(허윤진)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현,이라는 비평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