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스티븐 달드리, 2002)
필립 글래스는 영화 <디 아워스> 음악 감독을 맡는다. 필립 글래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영화의 난점은 대번에 눈에 들어 왔다. 세 편의 이야기 각각이 너무나 뚜렷이 구분되고 하나의 구심점에서 이탈하려 하기 때문에 영화 전체로서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세 가지 악상을 생각해 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장면에서는 주제 A를 사용했다. 주제 A는 버지니아 울프의 몫이었다. 마찬가지로 로스앤젤레스 장면에는 주제 B를, 뉴욕 장면에는 주제 C를 배치했다. 영화는 A•B•C 차례로 진행되고, 여섯 개의 릴이 모두 그 얼개를 따른다. 마치 한 줄로 길게 꼰 새끼가 영화 전체에 걸쳐 풀려 나오는 것 같았다. 개념적인 착상이었고, 음악을 통해 그것을 구현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난항이었지만 그래도 성공적이었다.”(<음악 없는 말> 486쪽, 프란츠, 2017)
자서전을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 <디 아워스> 때문에 필립 글래스를 알게 되었고 <디 아워스> 때문에 <음악 없는 말>을 읽었다. 부분 부분 듬성 듬성 읽었다. 제일 먼저 읽은 대목은 영화 <디 아워스> 음악 작업에 관한 글, 영화 <디 아워스>에서 음악은 부유하고 유동하고 잔존한다. 마치 뿌리 내리지 못한 세 여인의 삶처럼. 사실은 뭐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음악과 영화 형식(편집)의 조화, 영화와 영화 음악이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면, 아니 밀도 있는 길항을 이어가야 한다면 딱 이 정도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아니라 악명 높은 영화 제작자 스콧 루딘이 필립 글래스를 섭외하고 스코어 작업을 꼼꼼히 챙겼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처음엔 감독 안목이라 생각했었다. 필립 글래스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하면서 영화 찍는 현장과 편집 과정을 꼼꼼하게 살피고 기록하고 몸을 섞는다. 현장을 발로 뛰면서 영화 분위기를 파악한 셈, 영감은 자주 사색이 아니라 몸(겪음)에서 말미암는다. 음악도 손발로 쓰는 거다.
스티븐 달드리는 영화 <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를 연출한 감독이다. <더 리더>는 감독이 누구지?라고 생각하게 만든 영화다. 이후 스티븐 달드리가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연출하고 <디 아워스>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와 감독을 따로 따로 알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보게 된 <디 아워스>를 통해 꿴 셈이다. 스티븐 달드리는 희망을 섣불리 얘기하지 않는다. 어떤 인생이든 마주할 수 있는 삶의 고통을 그저 여미고 저민다. 가슴을 후벼 파려고 들지 않지만 가슴 아래께 싸한 통증을 일으키고,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지만 눈두덩이를 시큰하게 만든다. 우아한 슬픔, 고통을 그리면서도 자극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우아한 슬픔이라니. <빌리 엘리어트>는 '빌리'는 <더 리더>에서 '마이클'이 되고, <디 아워스>의 '로라'는 <더 리더>에서 '한나'가 된다. 스티븐 달드리는 영화를 통해 어떤 자기-없앰(자살)은, 사회적 타살이 아니라 시대의 한계가 떠 밀어낸 인생이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자유죽음”일 수도 있다고 읊조린다. 스티븐 달드리는 음악까지 세심하게 쓰니 당해낼 도리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끝내 자기를 없앤다. 로라는 자기를 없애려고 했지만 마음을 고쳐 먹는다. 결단이라기보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탓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지만 굴레, 둘째를 낳자마자 집을 박차고 나가 생을 잇는다. 클래리사는 옛 연인이 코 앞에서 자기를 스스로 없애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맞이한다. 영화 포스터에 낸 빈자리는 리차드 것이 틀림없다. 영화 보는 내내 숨 막혔다. 시대마다 여성들은 옥 죈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을테다. 공범 의식이랄까, 세 여성 편에서가 아니라 그들 반대편에 있는 남성들과 다를 리 없는 나 자신에 대한 푸념과 한탄, 남자는 과연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니콜 키드먼은 분장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를 그대로 재현했다. 목소리 톤까지 조절해 버지니아 울프가 삶을 스스로 접기까지 짧은 하루를 담담하게 그린다. 캐릭터에 힘을 주면 눈물은 짜내겠지만 보는 이의 마음엔 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니콜 키드먼은 잘 알고 있다,는 듯 연기한다. 무미건조해서 더욱 아리다. 고통 속에 있는 이가 더 없이 냉철해지는 자기 모순의 순간순간을 똑똑하게 잡아낸다. 그해 니콜 키드먼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꿰 찬다.
줄리안 무어의 하루는 길다. 폭력적인 전후 시대, 겉으로 풍요롭지만 핍절한 시대의 파리함을 제대로 그린다. 이유 없는 공허와 끝없는 우울의 나락,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말의 폭력성마저 미묘하게 비틀고 꼰다. 웃음 속에 난 뻥 뚫린 구멍, 그 메마른 깊이를 말투와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처연하게 그릴 수 있는 건 줄리안 무어 밖에 없지 싶다.
메릴 스트립은 리처드에게 기꺼이 자신 자리를 내어준다. 존재감 짙은 이가 누군가의 대역으로 슬그머니 물러나 앉으면서도 제 몫을 다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배우는 액션뿐 아니라 리-액션으로도 자신을 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인생을 살아 온 여성에게 존재하는 감정의 모순과 뒤죽박죽을 섬세하면서도 선 굵게 펼쳐 짓는 그녀의 하루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셋은 거의 마주치지 않지만 불꽃을 튀긴다. 다시 없을 캐스팅과 연기의 향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