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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Nov 23. 2022

<마더!>, 지옥은 지금 여기!

<마더!>(대런 아로노프스키, 2017)

<마더!>는 영화 포스터마저 의미심장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수입/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라는 글이 솟아오른다. 놀랍다. 가장 상업적이고 수익률을 따질 곳에서 뭘 믿고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영화를 수입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영화와 상업 영화의 경계가 무너진지 오래다. 자본은 시장성만 있다면, 아니 자본은 배급망과 홍보력으로 없던 시장성도 만든다. 전작 <노아>때 재미를 좀 봤나, 아니나 다를까 찾아보니 2백만을 조금 넘었다. 제작하지 않고 수입해서 이 정도면 짭짤하다.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전작의 흥행을 믿고 덤벼든게 분명하다. 결과는 역시 폭망이다. 정말이지 작심하고  찍은 좋은 영화는 환영도 대접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프닝은 기괴하다. 집은 피조 세계의 축소판이라기보다 귀신의 집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더 혼란스럽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유대인이다. 유대인(감독)의 성서 이해를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전작 <노아>가 성서에 대한 감독의 주해, 특히 노아가 받은 계시는, 신이 창조한 지구에서 피조 세계의 생명 보전을 위해 사라져야 할 것이 인간이라는 설정은 독특하면서도 신선하다. 계시 해석에도 확정 편향은 작용한다. 노아 이야기를 눈물겨운 인간 보존으로 읽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 중심적,이다. <마더!>는 <노아>보다 한층 더 노골적이다. 노골적인 영화가 그리는 ‘낯선 것’을 그저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지적 게으름은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는 백인•이성애자•비장애인•남성의 역사다. 승자독식의 역사, 근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에게 자연은 더 이상 생명의 근원이거나 인간과 공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정복과 착취의 자원이 된다. 메시야가 왔지만 젠더•계급•인종의 견고한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인류 투쟁 역사 한 단면은 남자 사람이 신을 빙자해 만든 악과 악의 구조에 대항하기 위해 여자 사람들이 흘린 피의 역사다. 그들이 기대하는 해방과 구원은 지체•지연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해서 재현된다. 영화 <마더!> 중•후반부는 인류 역사가 지구 상에 기입한 폭력과 투쟁의 역사를 그대로 생생하고 신랄하게 그린다.


신은 인간‘을’이 아니라 인간’도’ 창조했다. 곰곰히 생각하면 지구 역사가 인류 역사와 인간 문명의 역사여야 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지구 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은 ‘인간(남자•가부장)’이(라는 감독의 질문은 반복되고 깊어진)다.



신=남자라는 심각한 오독은 언제부터 시작된걸까




신=남자?! 남자=신!?


영화 <마더!>는 연극적이다. 좁은 공간을 뱀처럼 드나들고 헤집는 카메라는 유독 여자만 타이트하게 클로즈업해서 영화 내내 여자를 비추고 그 뒤를 빠싹 따라다닌다. 관객은 시작부터 시각적 억압을 통해 여자가 겪고 있는 폐쇄 공포증을 제대로 (간접)체험한다. 영화 초반부터 집은 스윗 홈이 아니라 감옥이나 정신 병동 혹은 귀신의 집처럼 느껴진다. 집에 불청객이 찾아들면서 여자는 남성 중심의 소통이 가지고 오는 폭력적인 현실이 재생산되는 것을 매일 매일 뼈저리게 경험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법적 제도, 그 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아이 낳은 여자는 ‘미혼모’다. 아이는 ‘사생아, 하지만 남자를 지시하는 말은 없다. 남자의 불장난과 실수, 모든 책임과 멍에는 약자인 여자와 아이만을 향한다. 명명과 이름 짓기는 권력의 속성과 지배 구조를 폭로하지만 한편으론 철저히 속이고 은폐한다. 여자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아이를 낳으면 엄마(마더)가 되지만 남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다. 때로 ‘자유’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이고 권력 없는 이들에겐 그저 환상이나 신기루일 따름이다.





지구와 자연을 생명의 근원, 모성과 연결짓는 레토릭에도 은폐된 권력, 세상을 지배하려던 남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시’를 짓고 가정을 위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모든 걸 누리고 향유할 수 있는 특권, 인류 역사는 남자에게 거의 무제한의 면죄부를 부여했고, 그 과정은 구조적인 폭력을 양산했지만 반성•사과는 없었다. 거대한 가치와 당위가 양산한 법과 도덕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었다. 배제와 폭력의 구조 위에 세워진 허울뿐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오작동했음에도 조정되거나 폐기되지 않는다.


영화 <마더!>에는 수많은 메타포가 정신없이 펼쳐진다. 영화 중후반부를 관통하며 집에서 펼쳐지는 혼란과 지옥도는, 신이 창조했다는 남자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지은 장소가, 가부장제 논리에 따라 구축된 유토피아적인 미래 전망과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아이를 낳으며 엄마가 된 여자에게 ‘탈주’라는 인식과 실천 가능성을 갖게 만든 ‘메시아적 모멘트’도 순식간에 휘발한다. 절망적이게도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는 이 집구석, 남자가 만든 인류 문명과 이 지구상에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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