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기예르모 델 토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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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환상 잔혹 동화, 수두룩한 아름다움과 찬란함이 넘치고 오프닝 시퀀스부터 휘감아 도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음악도 꺅이다. 하지만 무성한 소문 탓일까 만족스럽지 않았다. 익숙해서일까, 상투성 탓일까, 음악•미술•디자인•분위기도 끝내주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곰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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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호킨스의 연기는 모드를 연기한 <내 사랑>에서 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발짓과 손짓, 표정 하나로 깊고 너른 차이와 차원을 시공간 속에 펼쳐내는 아우라는 감탄스럽다. 무용적이고 연극적인 몸짓과 표정, 감출 생각없이 대놓고 ‘나는 연기하는 중이에요’하는 연기에서 뿜어나오는 매력과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탄복할 수 밖에 없다. 대사없이 얼굴을 돌리고 몸을 내밀고 발을 비틀어 앉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 카메라와 몸의 동선을 정확하게 겹쳐내는 그녀의 연기, 타고난 감각과 눈물겨운 노력이 이룬 어떤 품격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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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욕망이 몸이라는 육체의 물성과 어긋나지 않고 일관되게 구현되는 일상의 삶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종족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성과 욕망의 구현이라는 쾌락으로서의 성은, 하나의 육체 안에서 구별되지 않지만 역사와 사회는 두 가지를 분리•관리하고 줄곧 억압했다. 사랑의 모양, 정형성에 대해 심각하고 파괴적이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되돌아올 부메랑을 피하기 위해?!) 동화 혹은 판타지라는 양식으로 처음부터 우회 전략을 편다. 그만큼 절실하면서도 위험한 일이라는 뜻일까? 아름답지만 치명적일 수 없고 논챙을 유발하지 않을 애초의 구조적인 설정, 영화를 보는 동안 이상하게도 이안 감독이 그린 <색•계>와 <브로크백 마운틴>이 떠올랐다. 그만큼 절절한 사랑이지만 그래서 영화의 호들갑처럼 위험할 이유없는 사랑이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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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사람이라는 지점에 구현된 양서 생물의 육체는 단단하고 관능적이다. 카메라는 그 육체에 담긴 단단함과 관능을 마음껏 훓고 누빈다. 가로로 닫히는 눈꺼플 속에 감춰졌다 드러났다를 반복하는 순진하고 해맑은 눈망울, 마법같은 신비로운 능력 또한 전형적이다. 여자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비껴간 설정이 거기 그 지점에서 대번 한계와 마주한다. <미녀와 야수>에서 저주가 풀리고 내뱉은 장탄식은 “내 야수 내놔!”다. 갖은 매력이 사라진 멀끔한 왕자 남자 사람, 치명적인 매력은 온데간데 없다. 어쩌라고! 영화에서 양서 생물이 뿜어내는 매력만큼 영화는, 영화의 메시지는, 덜컥거린다. 징그럽기보다 성적인 매력을 한껏 뿜어내는 양서 생물은 고정관념을 뒤흔들기보다 다른 차원으로 무언가를 비껴가고 은폐한다. 역사 속 짐승같은 시대와 세계라는 설정, 구조 조정 당한 맘씨 좋은 이웃 예술가 아저씨와 실패해가는 결혼 생활을 체념하는 직장 동료, 마이클 섀넌이 연기하는 나쁜 놈의 전형성 또한 은폐를 더욱 부추긴다. 기예르모 델 토르 감독은 이만큼 순수하거나 그만큼 약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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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연출의 감수성에 공감하지 못한 채 영화의 상투성에 대한 이 모든 잡생각과 투덜거림은 내가 남자 사람인 탓이다. 그 또한 한계라면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