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8부작, 애플 티비)
1
만화 원작 <신의 물방울>을 읽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그만 뒀다. 처음에는 다들 난리쳐서 반골 기질이 발동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1권을 폈지만 이내 읽다 말았다. 그림보다 글이 많은 만화책은 만화가 아니다. 차라리 책을 읽고 말지. 만화의 묘미는 지식과 정보 전달이 아니라 컷과 컷 사이 행간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미나게 그려내는 데 있다. 일본 만화 중에는 오타쿠 정신이 가득한 책들이 많다. 만화 책을 읽는데 어떤 분야에 대한 웬만한 책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만화책, 대견하긴 해도 (내 생각에) 만화책은 아니다. 글과 정보가 많아도 컷과 컷 사이 놀랍도록 잘 녹여내 그걸 뛰어넘은 만화 책도 분명 있다. 신의 물방울은 그림보다 글로 말하는 만화였다. 1권을 펴자마자 질겁했었다. 글이 많고 그림이 별로인 만화 중에 전권을 읽은 건 <하이큐>가 유일하지 싶다. 아직도 등장 인물이랑 이름을 모르겠다. <슬램 덩크>의 성공 요소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학교와 등장 인물 이름까지 번역한 탓이 크(다고 본)다.
2
해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거의) 없다. 새로운 구성과 전개만 있을 따름이다. 실사판 드라마 <신의 물방울>의 이야기는 뻔하다. 전형적인 이야기, 주인공은 치명적인 약점(트라우마)을 가졌고 그걸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복해간다. 천재와 노력파의 대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정말이지 해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까? 너무 새로우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고 새로운 게 없으면 뭐하러 읽고 보느냐 말이다. 원작 만화를 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간만에 흥미진진하고 재미난 드라마다. 1편씩 아껴서 보는데 8편 밖에 되지 않아 아쉽다. 소재가 와인이라 그럴 수도 있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 탓일까? 딱 봐도 저건 너무 심하다 싶지만 드라마라 치고 그 정도는 봐줄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와 도쿄를 오가는 것도 원작과 다르다는데 설정을 영리하게 했다. 살펴보니 프랑스 TV와 니폰 TV 자회사인 Hulu Japan 합작품이다. 콜라보로 좋은 시너지를 낸 사례가 되지 싶다. 드라마 <신의 물방울>은 얄밉게 영리하다.
3
콜라보(협업)를 이종 교배로 읽는다. 다름이 만나 새로움을 짓는 것, 파격에 방점을 두기 보다 서로 배우는 데 있다. 물론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다. 생명이 환경을 견뎌내고 적응하는 밑바탕에 돌연 변이가 있는데 바꿀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적응은 또 다른 안정이다. 안정은 결국 도태를 낳는데 또 다른 돌연 변이를 통해 새로워진다. 지구를 넘어 우주의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의 증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거스를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유일하게 버티고 거스르는 게 생명 현상이다. 브랜드건 제품이건, 문화 현상이건 패션이건 인류 역사가 증언하는 바다. 콜라보를 통한 이종 교배, 이종 교배를 통한 돌연 변이의 출현, 새로움은 익숙한 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구성하는 데 있다. 자신 있게 다르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에 능숙해야 한다. 기본기가 중요한 건 그래서 그렇다. 파격이 파국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을 파고 드는 파격은 운도 필요하다. 운을 끌어 당길 수 있는 노력과 끈기, 오래 다져온 기본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고로에다 히로카즈도 그렇고 박찬욱도 그렇고 봉준호도 이런 시도를 즐겼다. OTT 플랫폼이 마련되었으니 이런 시도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왜 감독은 한 명인가? 거장 형제 감독들이 있지 않은가? 영화 감독은 2명이서 같이 하면 안되나? 시너지를 낼 만한 좋은 감독들의 공동 작업을 기대한다. 상대가 자기 보다 뛰어나도 개의치 않을 사람, 각본도 편집도 두 말하면 잔소리,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는 걸 이겨낼 만한 사심없는 도전과 시도가 많아지면 좋겠다.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영화 내용처럼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