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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Nov 21. 2022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그저 그릴 수 밖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드워드 양, 1991)



감독 에드워드 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91년 동경 국제 영화제에서 발표되었는데, 그 해 대만 출품작으로 인정하지 않은 중국의 압력과 폭거로 인해 우스꽝스럽게도 일본 작품으로 분류되었다. 다행히 그 해 심사위원 특별상과 국제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했다.


1947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양은 두 살 때 중국 본토에서 가족들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는 철저히 '외성인'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전기 공학을 전공했고 1974년 USC 대학의 영화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시애틀에서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했다. 1981년 대만으로 돌아와 이듬해 ‘대만 뉴웨이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 고사> 중 단편 <갈망>을 만들며 영화 감독으로 ‘마침내’ 데뷔했다.





대만의 근•현대사도 살벌하고 처절하다. 특별히 1947. 2. 28 사건과 전후 대만 현대사를 살피는 일은, <고령가 살인 사건>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는데 필수적이다. 이를테면 밍과 오쓰야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이른 밤 동네 작은 다리 위를 탱크가 줄지어 지나가고 카메라는 반대편에서 탱크 사이로 둘의 대화 장면을 비춘다. 육중한 탱크의 무게에 깔리고 줄지어 지나가는 탱크의 굉음에 짖눌린 소년과 소녀의 대화, 사무치게 비관적인 에드워드 양의 연출은, 이런 식이다.


고정된 카메라 쇼트에 등장 인물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줄지어 나간다. 뛰어다니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소년들은 물고기떼 같다.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차경에 벌어지는 일 사이의 묘한 긴장감, 공간과 인물의 레이어는 다층적이고 차경에 물끄러미 펼쳐지는 장면들 하나 하나는 예사롭지 않다. 차경에 등장했던 인물이 시간이 지나 사건 전면에 등장하고 전면에 등장했던 인물이 슬그머니 뒷 배경으로 밀려났다가 나중에 또 다른 사건으로 다시 만난다. 영화가 긴 것과 지루한 것은 별개다. 눈을 뗄 틈이 없다.





에드워드 양은 대만 영화계에서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정부[官]의 권력을 줄곧 비판해왔고 저항했다. 그의 후기 대표작인 <하나 그리고 둘>은 칸영화제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만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양은 2007년 6월 29일 죽었다. 향년 59세, 대장암 탓이었다. 에드워드 양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동동의 여름방학>에 아버지 역(까메오)으로 출연하는데 삐쩍 말라 멀대 같다. 영화 마지막 장면, 동동을 차에 태워 대만으로 돌아가는 그가 문득 차를 멈추고 주위의 산들을 둘러 본다. 허우샤오 시엔과 에드워드 양의 우정, 젊은 에드워드 양의 옆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우리의 시대는 그의 죽음으로 정말 끝이 나버렸다
(허우 샤오시엔)






1960대 대만과 카메라


상영 시간 237분, 237분 내내 카메라는 한 가족의 일상과 소년 소녀들이 겪는 사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사건이 터지고 살육이 벌어지며 사건이 소용돌이 치지만 이야기는 그저 흘러 흘러 간다. 카메라는 민첩하지 않고 편집 기교도 없다. 하지만 영화는 마음을 열고 그 시대의 공기와 아픔을 들여다 보려는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사무침과 흐느낌의 순간을 선물한다. 영화란 과연 무엇인가?


1947년 2•28 사건 이후 대만은 38년 동안 장개석 정부의 계엄령 아래 철권 통치를 맞이한다. 대만 2•28 사건은 5•18 광주 항쟁 혹은 제주 4•3사건과 엇비슷하다. 대만 주민은 지난 청•일전쟁 이후 겪었던 50년간의 일제 식민 지배와 다를 바 없는 고통을 겪는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공산당을 피해 대만에 자리잡은 정부는 명분과 실제가 달랐다. 외성인과 내성인 사이의 갈등, 본토인의 피해 의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대만인들은 일제의 식민지배보다 더한 이 시기를 꿈도 희망도 없이 보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카메라의 지독하고 우직한 응시가 피할 수 없는 순간을 자아내는 영화다. 좋은 영화는 비평이나 해석을 거부하거나 초라하게 만든다. 언젠가 만날 줄 알았지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어느 날 느닷없이 만났다. 에드워드 양은 20년간 영화 감독으로 현대 대만인의 삶을 담는데 필모그래피를 진력했다. 단순함이 주는 극강의 예술성, 인생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영화로 찍어내고 남기려는 담담한 욕심, 힘을 빼면 바위가 뜷린다. 느리게 서성이는 카메라의 품격, 물끄러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현대 미디어 영상이 펼치는 자극과 가벼움에 무뎌지고 중독된 감각을 일깨우는 해독제다. 카메라는 젠체하지 않고 에드워드 양은 관객을 데리고 놀거나 놀리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인생이라는 것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하고 오해는 필수적이며 아프고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일로 가득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럴 때 필요한 자세는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 응시다.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저 물끄러미 ‘지독하게’ 기다린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대만 영화를 죽이는 나쁜 놈이다.
(에드워드 양)





그릴 수 밖에...


대만의 참혹한 현대사, 말(글)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려야 했을 것이다. 빛과 소리로라도 그려 두어야 했을 것이다. 문자로는 기록할 수 없는, 어떤 의무감, 어떤 사실은 말하는 순간, 쓰는 순간, 우습고 유치해진다. 삶은 써서 채울 수 있는 것보다 그릴 수 밖에 없는 빈 곳이 더 많다. 삶은, 언제나 그렇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에드워드 양이 직접 영화사를 세우고 청소년 배우들을 선발해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주요 등장 인물만 100여 명이 넘는다. 톨스토이가 읽기 어려운 것은 분량 뿐 아니라 따라 잡기 힘든 수많은 인물 탓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양의 대만 3부작이라 불리는 세 작품은 <청매죽마> <공포분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다. 아직 한 편을 보지 못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쇼트들은 이야기를 따라 정교하게 짜여지지 않았다. 퍼즐처럼 흩어진 장면과 사건들이 불쑥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그래서 즉각적인 의미 파악은 어렵다. 알려고 달려들지 말고 들으려고 한 걸음 물러나 기다려야 한다. 의미 파악은 더디지만 장면과 장면이 켜켜히 쌓이면서 영화 전체는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자주 어둠으로 채워지는 화면은 깜깜한 영화관과 하나되어 육박하고 덮쳐 온다. 두려움이 아니라 연민으로, 따뜻한 누군가의 품에 얼굴을 파 묻었을 때 얻게 되는 안도감이랄까, 참혹한데 울컥 슬픔으로 밀려오는 정서는, 섣부른 위로와 다르고 때 맞지 않은 화해와도 다르다. 불현듯, 마술이 일어난다. 의미가 비워지거나 지워진 순간과 공간이 마법처럼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는 그 순간, 그저 체험된다.





물 위에 퍼지는 파문처럼 잔잔하게 퍼지면서 쇼트들과 사건들, 그 많은 인물 개개인의 사연이 화학 작용을 일으켜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완성된다. 카메라는 그 순간에도 느리게 서성이거나 멀찍이 떨어져 응시한다. 에드워드 양은 카메라가 대상과 얼마만큼 떨어져 있어야, 쇼트의 길이가 얼마나 지속되어야, 어떤 각도에서 얼마 정도 비추고 있으면, 울컥 슬픔이 밀려 오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가슴 아프다. 어떤 장면을 떠 올리면 사무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해 쓰는 게 부질없다. 써도 써도 동어반복, 제자리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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