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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4절기

유두(流頭)

유월유두

by 하얀술

유두의 유래

유두의 풍속이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유두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3세기 고려 희종(熙宗) 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金居士集)》에 의하면, `동도(東都: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厄)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유두에 대한 기록은《중경지(中京志)》권2 풍속조에도 보이며,《고려사(高麗史)》권20 명종(明宗) 15년 조에는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는데, 나라 풍속은 이 달 15일에 동류수(東流水)에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며, 이 회음(會飮)을 유두연(流頭飮)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경주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액막이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 (流頭宴)이라 한다.

조선의 풍속도 신라 이래의 옛풍속으로 말미암아 유두를 속절로 삼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을 통하여 유두는 최소한 신라시대부터, 또는 그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풍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풍속 편에는 여인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에서는 정릉 계곡, 광주에서는 무등산의 물통폭포,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의 성판봉(城坂峰)폭포 등을 적합한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이승만의《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정릉계곡 외에도 송림(松林)과 물이 좋은 악박골과 사직단이 있는 황학터(黃鶴亭:활터) 근방과 낙산 밑 등이 서울의 물맞이 장소로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유월 유두날의 부적 ? 유두면을 문설주에 걸어 매어 액막이하다

밀가루로 구슬 같은 모양을 만들어 유두면이라 한다. 거기다 오색의 물감을 들여 세 개를 이어 색실로 꿰어차고 다닌다. 혹 문설주에 걸어 매어 액을 막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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