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孔明의 순무
강화는 순무가 유명하다. 지역적 특성이 강한 식료이기도 하다. 강화순무씨를 강화 아닌 다른 지역에 파종하여 수확한 순무는 강화순무와 그 맛과 향이 아주 다르다. 강화순무만큼 지역적 특성이 강한 식료도 드물 것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순무를 찾아보자.
순무는 쌍떡잎식물 십자화목 십자화과(배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로 중국에서 처음 도래되었다. 순무는 봄에 노란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뿌리와 잎에 많은 비타민을 함유한 채소이다. 잎은 긴 타원형이며, 품종에 따라 바소꼴, 무잎 모양의 깃꼴의 모양이 있다. 뿌리의 크기나 모양 또한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팽이 모양의 둥근형이다. 그냥 무와 확연히 다른 점은 뿌리의 색인데, 색이 그냥 무와 달리 자줏빛을 띄고 있다. 맛은 매콤한듯하나 고소하며 겨자향의 인삼맛이 난다. 순무는 무를 재배하는 방법으로 재배하면 되지만 늦여름에 파종하고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수확하는 것이 많다.
한국어: 순무
한문: 蔓菁(만청)
중국어: 芜菁 (wújīng),蔓菁 (mánjing), 诸葛菜 (zhūgěcài)
일본어: 菘(すずな, 스즈나), 蕪(かぶ카부、かぶら카부라)
영어: Turnip
학명: Brassica rapa
강화의 지역적 특성이 강해서 순무의 원산지는 당연히 강화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순무의 원산지가 중국이고, 중국 여행중에 먹었던 제갈채 諸葛菜 가 순무의 중국 명칭이라니 신기하다.
중국 역사상 순무를 가장 유효적절하게 이용한 사람이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이었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유비의 군사였던 제갈공명은 전쟁 중 주둔지에 꼭 순무를 심었다. 어린 싹은 채소로 먹었으며, 잎이 굵어지면 삶아서 먹었고, 순무는 김치를 담아 먹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순무는 제갈채(諸葛菜)라고도 불렸다. 제갈공명이 왜 순무를 둔전용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 순무는 성장이 빨라서 금방 키워 먹을 수 있다.
- 채소가 부족하기 쉬운 식단에 순무만큼 영양을 공급해주는 채소가 드물다.
-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익혀서 먹을 수도 있다.
- 재배하는 데 비용이 매우 저렴하여 금방 진영을 옮기게 되어 재배한 것을 버리게 되더라도 아깝지가 않다.
물론 후대의 각색이 적절하게 섞인 이야기겠지만 삼국시대가 지나간 후 전 세계의 수많은 군대가 채소를 못 먹어서 각기병과 괴혈병에 걸려 지옥행 열차를 타거나 보급도 제대로 못해 무료 기아체험을 한 것과 비교해보면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 혜안을 가진 인물인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때문인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인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 齊民要術 에도 순무 재배법이 수록되었고 후대에도 순무는 군량용으로 적절하다고 평가받았다. 원나라 왕정(王禎)의 농서(農書,1313년)에는 순무에 6가지 장점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첫째, 순무는 싹이 나오면 어린 싹이라도 가히 먹을 수 있다.
둘째, 자람에 따라 그 잎을 따서 삶아 무쳐 먹을 수 있다.
셋째, 오래 두면 스스로 자란다.
넷째, 군대가 이동할 때 버리고 가도 아깝지 않다.
다섯째, 돌아와서 찾기 쉬워 다시 뜯어 먹을 수 있다.
여섯째, 겨울에도 그 뿌리를 먹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서양에서도 순무는 꽤 유명한(?) 식료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보급받은 빵과 버터를 힌덴부르크 빵과 버터라고 불렀다. 병사들이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참모총장이자 전쟁 영웅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어떤 빵과 버터였기에 그랬을까?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는 독일군 병사가 먹던 음식이 나온다. “아침은 순무로 만든 빵, 점심은 순무 수프, 저녁은 순무를 튀긴 커틀릿과 순무 샐러드….” 전선에 새로 배치된 독일군 병사가 투덜거리자 참호 속 고참이 대꾸한다. “너희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순무로 만든 빵을 먹다니…. 이곳에서는 가끔가다 톱밥으로 만든 빵이 지급되거든.”
힌덴부르크 빵은 순무로 만든 빵이었다. 순무 빵은 순무를 바짝 말린 후 밀가루처럼 갈아서 반죽해 만든다. 빵이라고 불러서 그렇지 순무를 그대로 삶아서 먹기에 난망해서 갈아서 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온종일 찐 순무만 먹다 보니 독일군 병사들은 불만이 커지고 사기도 떨어졌다. 그러자 독일군 사령부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힌덴부르크 빵이라는 별명이 붙은 순무 빵에다 발라 먹으라고 버터를 지급했다. 하지만 식량이 떨어져 하루 세 끼를 순무를 먹어야 했던 독일에 제대로 된 버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혹시 돼지비계로라도 만들었을까? 생김새는 비계처럼 하얀 덩어리였지만, 사실은 순무를 갈아서 만든 순무 잼이었다. 잼이라고는 하지만 설탕을 넣고 제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물기를 제거한 순무 즙일 뿐이었다.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순무 빵을 먹는 것이 지겨우니까 진짜 버터를 발라 먹는 것처럼 기분전환이라도 하라는 독일군 사령부의 고육지책이었다.
독일의 전쟁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 장군은 왜 병사들에게 하루 종일 순무로 만든 빵과 버터를 먹여야만 했을까?
준비가 전혀 안 된 채 시작한 전쟁은 5년이라는 장기전이 되면서 독일경제는 파탄이 났다. 게다가 1916년부터 영국이 독일 해안을 철저하게 봉쇄하면서 해외로부터의 물자 반입이 중단됐다. 철저하게 독일 영토에서 생산하는 식량으로 자급자족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16년 겨울, 독일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는다. 농사를 완전히 망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한창일 때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기에 독일은 재배 작물을 두 종류로 단순화했다. 하나는 독일인의 주식인 감자였고 또 다른 하나는 가축들에게 사료로 먹일 순무였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가을비로 사람들이 먹을 양식인 감자가 수확도 하기 전에 밭에서 모두 썩어 버렸다. 그 결과 심각한 식량난을 겪게 됐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순무는 썩지 않았다. 순무는 추위에 강하고 웬만한 기후조건에는 잘 자라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순무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기보다는 가축사료에 가까웠다. 먹을 것이라고는 순무밖에 없으니 독일군 병사들은 삼시세끼 순무 빵과 순무 버터를 먹어야 했다.
힌덴부르크 빵과 버터가 생겨난 배경이다. 그나마 병사들의 식량 사정은 후방의 민간인들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민간인들은 밭에서 썩고 있는 순무와 이파리로 수프를 끓여 먹고 살았다. 그 결과 1916년 겨울, 독일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약 74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군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이 3번의 겨울을 순무의 겨울로 불렀다. 이 순무의 겨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에도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이 때문인지 독일의 나이드신 분들이 순무를 보는 관점은 우리나라 어르신들이 주먹밥을 보는 관점과 거의 비슷하다.
제갈공명이 주둔지에서 먹은 순무와 힌덴부르크가 전장에서 먹은 순무는 식생활 문화의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우리 민족도 오래 전부터 순무를 먹어왔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순무는 '여러 가지 채소 중 이롭기만 하고 해로운 것이 전혀 없는 가장 좋은 채소이다. 사철에 다 난다. 봄에는 싹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으며, 가을에는 줄기를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는다. 흉년 때에는 식량을 대신하여 쓴다. 오장을 좋아지게 하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기를 내리고 황달을 치료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중엽 이규보( 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가포육영( 家圃六詠)’에 순무에 관한 글이 있다. “ 담근 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소금에 절인 김치 겨울내내 반찬되네/ 뿌리는 땅 속에서 자꾸만 커져/ 서리 맞은 것 칼로 잘라먹으니 배 같은 맛이지.” 동국이상국집에는 채소밭에 심은 오이, 가지, 순무, 파, 아욱, 박 등의 여섯가지 채소에 대하여 생태적 특성과 조리가공법을 시로 읊고 있다. 순무에 관해서는 장아찌·김치조리방법·생육 과정·맛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숙종 때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는 '순무는 봄에는 싹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고, 가을에는 줄기를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을 수 있는 사철채소이다. 또한 흉년을 대비하는 데도 좋은 채소’라고 적고 있다.
순무는 약재로도 사용되었다. 전통 한의서인 [동의보감]에 의하면 ‘소만(小滿)에 순무의 꽃을 따서 말려 두었다가 어린아이가 감창(疳瘡)에 걸렸을 때 치료약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맛이 달고 이뇨와 소화에 좋을 뿐 아니라 만취 후 갈증해소에 특효가 있고, 특히 눈과 귀를 밝게 하고 건강과 미용에 매우 좋다한다. [본초강목]에는 ‘순무는 성질이 따뜻하고 황달을 다스리며 배뇨를 잘하게 하니 오래 먹으면 장생한다’고 했다
.
고려 시대의 [향약구급방]이라는 약재관련 서적에도 순무의 종자를 약재로 쓴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순무는 식료이자 약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화순무는 언제부터 강화순무였을까?
원래 강화순무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흰색 순무였던 까닭은ㅍ중국으로부터 유래된 때문이다. 헌데 지금의 강화순무는 보라색이다. 연유는 고종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2년 12월, 고종은 근대 해군 교육을 위해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 해군학교 설치령을 공표한다.
이에따라 영국에서 콜웰(W.H. Callwell) 대위와 조교 커티스(J.W. Curtis) 하사가 강화에 파견을 왔다.
지금의 해군사관학교는 진해에 있지만 원래 최초의 근대 해군사관학교는 강화도에 세워졌었기때문이다.
최초의 근대 해군사관학교는 통제영학당이다.
통제영학당에 파견된 콜웰 대위가 영국의 보라순무 종자를 가져와 강화도 사택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
콜웰 대위의 보라순무와 강화 하얀순무가 교잡 되어 지금의 독특한 강화순무가 되었다고 한다. 즉 현재의 강화순무는 흰색 중국순무에서 유래되어 보라색 영국순무와 교잡되어 토착화된 순무인 셈이다. 중국+영국=강화. 동서양의 역사를 품은 강화순무가 새롭게 보인다. 제갈공명이 전투 보급 식료로 순무를 심은 것은 물론 영국 콜웰 대위가 강화 파견지에 식료로 순무를 심은 것과 독일 힌덴부르크의 순무빵과 순무버터도 전투 보급 식료였으니 순무의 역사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수난과 가장 밀접했던 식료였던 셈이다. 이런 순무의 역사를 아는 지 모르는 지 현재 강화순무는 순무김치로 제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