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밥, 오곡밥, 묵나물, 귀밝이술
정월대보름
정월 대보름에 떠오르는 둥근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금쟁반(金盤)에 비유하기도 하며, 동시에 한 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보름날 음식상에는 갖가지 풍요로운 음식이 올라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변변한 수확도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음식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오곡밥과 묵은 나물은 ‘황후의 밥, 걸인의 찬’에 비유할 만하다. 다른 작물에 비해 비교적 저장성이 높은 곡물을 이용한 오곡밥과 지난해 말려 두었던 여러 야채로 무쳐 놓은 나물은 풍요로움보다는 오히려 작년에 수확하였던 음식을 소비한다는 의미가 크다. 소멸은 곧 새로운 생장을 의미한다는 세시풍속의 순환론에서 봤을 때, 농사의 시작인 대보름에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먹는 데에는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약밥
찰밥(糯飯)에 대한 기록은 ‘점반(粘飯)’, ‘나미(糯米)’와 같이 찹쌀로 지은 밥을 의미하기도 하고, ‘약반(藥飯)’, ‘향반(香飯)’과 같이 우리가 흔히 약식(藥食)이라고 부르는 음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1500년 전 대보름에 먹었다던 찰밥은 음식의 종류는 조금 다르지만 약밥이나 현재의 오곡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대부분 ‘약밥(藥飯)’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며, 간혹 찰밥의 용례가 보이지만 명확한 구분 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약밥이라고 이름 지은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꿀을 약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약밥 이외에 약과(藥果)나 약주(藥酒)에도 ‘약(藥)’ 자가 들어가는데, 이는 음식 중에 별미이고 귀중한 음식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약밥은 꿀을 넣었다고 하여 꿀밥, 밀반(蜜飯), 밀이(蜜餌), 종밀(粽蜜)이라고도 한다.
약밥은 찹쌀에 진간장으로 색을 내고 대추, 밤, 잣 따위를 꿀과 함께 넣어 시루에 쪄내 참기름을 발라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 권4에 “꿀같이 단 곶감, 주먹만 한 밤, 겨울이 지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진 붉은 대추로 약밥을 쪄 까마귀에게 먹이는 풍습은 지금까지 전한다.”라고 하여 약밥에 들어가는 재료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 무쌍 신식 요리 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과 『요리 제법(料理製法)』에 약식(약밥) 만드는 법이 전한다. 좋은 찹쌀을 물에 담가 놓는데 오래 담가 두면 밥이 질게 되므로 한나절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좋은 대추, 밤, 실백을 찹쌀과 함께 시루에 넣고 진간장을 섞어 쪄 내는데, 오랫동안 쪄야 빛이 검어진다. 진간장은 약밥의 빛을 내기 위해 넣는 것이기 때문에 빛이 검고 맛이 좋은 간장을 사용하여야 한다.
이렇게 만드는 약밥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부잣집 자녀들이나 맛 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문집을 보면 맛이 매우 좋아 정월 대보름에 귀밝이술과 함께 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보내었다고 한다. 약밥은 중국에도 없는 우리의 고유한 음식으로 중국인들이 이를 ‘고려반(高麗飯)’이라고 하였다. 『열양세시기』에 역관들의 입을 통해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북경)에 갔을 때 정월 보름이 되어 옹인(饔人)에게 약밥을 만들라 명하고 이를 연경의 귀인들에게 맛보이니 그 여러 가지 맛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전한다.
『동국세시기』에도 약밥에 들어가는 대추, 밤, 잣 등은 서민들이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신 오곡밥을 지어 먹었다고 할 정도였다. 요즘 우리가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은 조선 후기의 모습인 듯하다. 오곡밥은 말 그대로 다섯 가지 곡식으로 지은 밥인데, 흔히 찹쌀, 수수, 팥, 조, 콩 같은 것이 들어간다. 대추, 밤, 잣 같은 특수 작물에 비해 구하기 쉬운 농작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곡식을 넣어 밥을 지어 먹는 것은 그해의 모든 곡식에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듯 약밥은 신라시대 찰 밥에서 유래하였으며, 현재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의 이전 모습인 듯도 하다. 찰밥, 약밥, 오곡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으나 이들의 출현 시기는 짐작할 수 있겠다.
묵나물
찰밥이나 오곡밥과 함께 먹는 묵은 나물은 지난해에 말려 두었던 박나물, 버섯, 대두황권, 순무, 무, 외꼭지, 가지고지, 시래기, 호박고지 같은 것을 삶아 먹는 풍습인데, 한자어로는 진채(陳菜)라고 한다. 대보름에 묵은 나물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이긴다는 속신이 있다. 이는 겨우내 부족했던 채소의 섭취를 도와주는 실질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묵은 나물과 여름 더위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시 수분을 모두 빼앗기고 햇볕에 빠짝 말린 나물을 미리 먹어 두면 여름의 땡볕 더위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보름에 찬물을 마시면 여름 내내 더위를 먹는다는 속신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대보름에 오곡밥과 함께 먹는 나물은 몇 종류나 될까? 이와 관련된 기록은 없지만 현대 민속 조사 자료에 의하면, 대개 아홉 가지의 나물을 무쳐 먹는다고 한다. 이는 대보름에 모든 행위를 아홉 번씩 하는 풍속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곧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칠언 절구시인 「상원죽지사(上元竹枝詞)」 ‘구식(九食)’에서 “여자는 아홉 번 밥 짓고, 남자는 아홉 번 나무하네” 하고 읊고 있다. 지금까지도 각 지방에서는 밥을 아홉 번 먹고 나무를 아홉 짐 하면 그해에 좋은 일이 있다고 믿는다. 아홉(九)이라는 수는 1에서 9까지의 수 중 가장 큰 수이자 가장 많은 수를 뜻하는데, 대보름에 모든 일을 아홉 번하므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오곡밥
정월 대보름의 대표적인 절식(節食)으로는 단연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들 수 있다. 묵은 나물이 조선 후기 기록에 보이는 것에 반해 오곡밥은 멀리 신라시대의 찰밥(糯飯)에서 유래를 찾는다.
21대 비처왕(신라 소지왕 10년) 때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왕 앞에 쥐와 까마귀가 나타났다.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쫓아가 보라고 하여 왕이 사람을 시켜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가라고 하였다. 까마귀가 어느 연못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그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글을 올렸다. 그 글에는 “이 봉투를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되어 있었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일관(日官)이 한 사람은 곧 왕을 가리키므로 봉투를 열어 보도록 간청하였다. 봉투를 열어 보니 ‘射琴匣(거문고 상자를 쏘아라)’이라고 적혀 있어 금갑을 쏘았더니 내전에 드나드는 중과 궁주가 있었다. 이 둘은 왕을 시해할 계략을 짜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신라 풍속(國俗)에 매해 정월 첫 번째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 등에 모든 일을 조심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16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糯飯)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한다.209)
이 설화는 왕을 위험에서 구해 낸 까마귀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정월 16일에 찰밥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설화의 시기를 488년(소지왕 10) 정월 대보름의 일로 규정하고, 신라 때부터 보름에 까마귀를 제사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속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조선시대 여러 문집에서도 정월 대보름 찰밥(약밥)의 기원을 『삼국유사』의 이 설화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까마귀의 보은을 위해 왜 찰밥을 사용하였는지, 까마귀에게 먹이는 찰밥이 왜 정월 대보름 절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까마귀는 우리나라 전역에 서식하는 텃새이고, 큰 무리를 지어 움직이면서도 집단을 지도하는 새가 없다. 이 때문에 까마귀 떼를 가리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고 폄하하는 듯하다. 이렇듯 까마귀는 흔히 볼 수 있고 신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는 새이다. 오히려 시대가 내려올수록 까마귀는 죽음을 가져오는 흉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시대 다른 설화인 ‘연오랑세오녀’나 ‘견우와 직녀 설화’에서는 까마귀의 긍정적인 역할을 담아내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동해에 살던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고대 태양 신화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으며, 연오와 세오의 이름에 까마귀 ‘오(烏)’ 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까마귀와 연관이 있다.
또한 칠석의 견우직녀 설화에서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떨어져 있는 견우와 직녀를 1년에 단 한 번, 칠월 칠석에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가 오작교(烏鵲橋)인데, 역시 까마귀와 연관이 있다. 이 두 설화에서도 까마귀의 비범한 역할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대의 까마귀에 대한 인식은 앞의 설화들에서처럼 유용한 정보를 알려 주는 신이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210) 또한 중국에서 전해진, 태양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삼족오(三足烏) 설화도 연오랑세오녀 설화처럼 까마귀와 태양 신화가 연결되어 있다.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보이니, 태양에 사는 신이한 까마귀에 관한 이야기는 꽤 오래되었다.
이 밖에 까마귀의 곧은 성품을 표현한 이야기도 있다. 중국 한나라 때 어사부(御史府)를 맡고 있는 주부(主簿)의 판결이 매우 공정했는데, 매일 밤이면 어사부에 들까마귀 수천 마리가 나뭇가지에 모여 자고 아침이 되면 흩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후에는 이처럼 까마귀가 깃드는 곳이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기관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언론 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는 일, 결송(決訟)을 통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풀어주는 일, 중대한 범죄인의 국문(鞠問) 등을 담당했던 사헌부(司憲府)를 오대(烏臺) 혹은 오부(烏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또한 까마귀를 공명정대한 성품의 상징으로 여겼던 데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약밥(藥飯)은 왕을 구한 까마귀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제사 지낼 때 올리던 음식이다. 이후에는 사당이나 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에도 사용하였고 제사 후 음복(飮福)을 통해 일반 사람들이 먹기도 하였다. 실제로 고려나 조선시대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약밥을 만들어 새(까마귀)에게 먹이거나 제물로 올리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찰밥과 까마귀의 관계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대보름에 찰밥 대신에 약밥이 절식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역시 찰밥 대신에 약밥을 까마귀 제사에 제물로 사용하였다. 이는 약밥의 검은 빛깔이 까마귀의 검은 색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국세시기』에 상원에 약밥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고, 『열양세시기』에도 약밥으로 조상에게 제사도 올리고 손님도 대접하며 이웃에게 보내기도 한다고 하였다. 『세시풍요』에서는 시절 음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하 는 풍습이 까마귀를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정월 대보름-까마귀-약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상식 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최남선은 정월 대보름에 먹는 약밥과 이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대접하는 것은 출처가 각각 다르다고 하면서 둘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더불어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풍속은 없어지고 정월 대보름 안에 사람이 약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여 이맘때쯤 약밥 장사들이 서울에 많이 돌아다니는데, 약밥은 까마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음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이후에는 점점 약밥과 까마귀의 관련성이 적어지고, 정월 대보름의 절식으로만 남은 듯하다.
부럼
이 밖에도 대보름 풍속 중에서 먹을거리와 관계있는 것으로는 대보름날 이른 새벽에 하는 부럼깨기가 있다. 부럼은 약밥에 들어가는 밤, 잣을 포함하여 호두, 은행, 땅콩 같은 껍질이 단단한 과실이다.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부름’이라 하였다. 부럼깨는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 찾아보기 힘드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러 문집과 세시기에서는 사례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부럼을 깨는 의미와 연결된 용어를 살펴보면, 『동국세시기』에서는 1년 동안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의미로 작절(嚼癤)이라 하기도 하고, 치아를 단단하게 하는 방법이라 하여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고도 하였다. 『열양세시기』에서도 대보름에 밤 세 개를 깨무는 데, 이 밤을 가리켜 부스럼을 깨무는 과실이라는 의미로 교창과(咬瘡果)라 하고 혹은 작옹(嚼癰)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부럼을 깨는 풍속은 한 해 동안 종기나 부스럼으로 고통 받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딱딱한 껍질을 깨물어서 나는 소리로 역신을 쫓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럼깨기(부럼깨물기, 부럼먹기)는 보통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고 한 번에 깨물어져야 좋다고 한다. 한 번 깨문 것은 껍질을 벗겨서 먹지만 첫 번째로 깨문 것은 먹지 않고 버린다. 그런데 『세시풍요』와 『조선 상식 문답』에서는 부럼을 깨는 이러한 풍속에 대해 딱딱하고 단단한 과실을 깨무는 것이 오히려 이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보이기도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이를 단단하게 하는 풍습으로 부럼깨기 외에 이굳히기(固齒)산적이 있는데, 쇠고기를 길쭉하고 얇게 썰어 양념한 다음 꼬챙이에 꿰어서 구워 먹는 음식이다.
귀밝이술
대보름에는 부럼깨는 풍속처럼 질병을 예방한다는 의미로 귀밝이술을 마신다. 귀밝이술은 아침 식사 전에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시는 술인데, 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믿는다.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명이주(明耳酒)라고도 하며, 『동국세시기』에서는 유롱주(牖聾酒), 중국 송나라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서는 치롱주(治聾酒)라고 하였는데, 조선 전기 문집에도 치롱주라고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이름을 불러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 하며 더위를 판다(賣暑·賣熱·賣暍).
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