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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본 Nov 05. 2020

기록 일기 _ 4일차

[나도 사람인지라....]

오늘 아침, 시작은 좋았다.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 새벽에 치뤄진 리버풀 대 아탈란타 챔스 경기 결과를 확인하니 5대0 대승! 이얏호! 기분좋게 하이라이트를 시청하고, 위풍 당당하게 (마치 내가 승리한 듯) sns며 기사를 훑어보는 이 짜릿함이란. 너무 기분 좋은 스타트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리버풀 선수들의 결과물 인 것. 언제나 반전은 뜬금없이 일어난다.


아침 식사를 하며 즐겁게 하이라이트를 정주행하고, 환불하러 다이소로 향했다. 쌀쌀하다못해 추운 날씨가 가볍게 차려입은 날 힘들게 했지만 어떤 추위도 어려움도 이젠 두렵지 않아. 리버풀이 이겼으니까. 조타가 해트트릭을 했으니까. 압도한 경기력를 보여줬으니까. 그런데 아뿔싸! 영수증을 안챙겼다. 분명 출발 전 영수증을 확인하고 넣었는데, 어디에 넣었더라? 하아...결국 환불은 못하고 다른 것만 이것저것 사고 돌아왔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런 바보같으니. 뒷주머니에 넣어넣고 긴 겉옷을 입으니 그새 까먹은 거였다. 결론, 내일 다시 가야한다.


다이소 실수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2천원 짜리 싼 물건이기도 하고, 사실 써도 상관없는 것이었으니까. 가벼운 실수 정도로 넘기고, 오전 공부를 시작해보았다. 오늘은 토익 공부! 오랜만에 집중해서 문제를 풀려니 좀이 쑤신다. 어렵지는 않은데, 집중력이 자꾸 끊긴다. 공부만 죽어라 할 때는 너무 공부에만 집중해서 문제였는데, 이런 내가 너무 낯설다. 어쩌겠는가, 10년 넘게 시험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으니. 아무래도 앞으로도 계속 주기적으로 시험을 봐야겠다.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오랜만에 점심으로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내 실력에 내가 감동했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역시 요즘 된장, 잘 나온다. 맛있게 배불리 점심을 먹고 기운을 내서 일터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소식. 와우! 학생 하나가 이번 시험을 망쳐서 거의 30점 이상 떨여졌는데, 그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사실, 이 친구와는 반 년정도 함께했고, 첫 시험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그 첫 시험도 자기 실력에 비해 과분한 점수였다. 너무 쉬웠다. 이 아니는 대체 그동안 무슨 공부를 했는지 정말 실력이 한참 모자랐다. 기초도 많이 부족해 기초 단어도 많이 몰랐다. 본문 해석도 혼자 못했다. 겨우 해석하는 방법 알려주고, 같은 본문만 얼마나 외우게 시켰는지.... 그러나 이번에는 외울 생각을 전혀 안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번 시험 본문은 분량도 길어지고, 내용도 꽤 어려웠다. 꼼꼼히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해 외워도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말로 본문 내용을 이해하기도 벅찰정도였다. 매번 문제풀라고 주는 것은 대충 찍고, 모른다고 보고 베끼고. 베끼지 말라고, 최대한 외워서 하라고 사정하고, 화를 내도 통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집중하지 않고, 방법을 알려줘도 매번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니 이제 내가 더 무엇을 해주랴. 이번 시험 본문이 어려워 더 집중해야 했지만 여전했다. 나도 사실 더이상 그 학생의 핑계도 짜증도 듣기 싫어서, "니 마음대로 해라"라고 생각한 것은 맞다. 나도 사람이니까.


나도 사람이니까 내 방법 싫다 마다하는 애한테 내 방법을 더이상 알려주기도 싫다. 뭐라도 머릿속에 넣을 생각도 안할 학생에게 대체 얼마나 더 무엇을 해주고 싶겠는가. 나도 사람인데. 정작 그 학생은 내게 공부를 배울 생각이 없었던거다. 그저 점수를 잘 받고 싶었던 거다. 그래, 어쩌다 자기가 외운 게 많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점수는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차피 난도는 계속 올라간다. 자신의 실력은 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매번 점수만 잘 받고 싶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매번 왜 영어를 공부하냐, 나는 외국 안 갈건데 등등 공부의 목적이나 이유조차 없던 학생인데. 학부모는 그걸 모르는거다. 왜 점수가 이 모양이냐 선생이 실력이 없는 것 아아니냐.


와우. 내가 10여년 간 이 일을 하며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다. 아니, 이 일이 아니어도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화가 나기 보다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도 알고 자신도 알거다. 얼마나 이번 시험 공부에 집중을 안했는지. 어렵다고 징징거리며 정작 알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았던 것을.


사실, 이런 학생과 수업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나마 학부모가 자신의 아이 상태를 알고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학부모는 자기 아이가 매우 성실하고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헬파티다. 선생이 아니라 마법사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일도 시작하기 전에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팍 상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날 위로하자 마음이 풀렸다. 그렇다. 열심히 노력하는 더 많은 학생들을 보며 기운을 내기로 했다. 더 많은 학생들이 잘 하고 싶어하고, 열심히 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이런 학생이라면 내가 먼저 거절이다. 나도 사람인데, 어루도 달래도 하기 싫다고 하는데 이런 모욕까지 참아가며 감싸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일까. 한 순간 욱 하는 분노가 차올랐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미국 대선 뉴스를 보며 글을 쓰고 있다.  바이든이 쉽게 되겠거니 했더니, 이게 웬일인지. 초 박빙 승부에 뉴스를 멈출 수가 없다.


이 일을 하면서 한 때 최선을 다해 아이의 성적과 실력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나만 열심이더라. 어차피 그들에게 난 스쳐지나가는 학원의 선생일 뿐. 나만 진심을 다했고, 아이나 학부모나 지나면 그저 남 일 뿐이다. 그래도 꿈을 찾거나 목표를 이루는데 내가 도움이 된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은 지금도 연락을 한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이 있어서 여전히 이 일을 하나보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 유명한 "미움 받을 용기" 책을 통해 배운 한가지가 이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상대방에게 진심을 다했다면, 그 다음은 모두 상대방의 몫이라는 것.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든 아니든 그것은 더이상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나는 상대방에서 최선만 다하면 된다. 그 다음까지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오늘 일을 겪으니 "미움 받을 용기"에서 나온 이 글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렇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여전히 내게 기대고 있는 학생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언제나 그렇듯, 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도, 사람인지라 날 건드리면.... 가만있기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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