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신의 영역
기원후 395년 로마 대제국이 동과 서로 분열되고,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은 '중세시대'를 맞이한다. 로마와 같은 강력한 왕국은 사라지고, 각 지역의 왕들은 여러 성의 영주들과 군신의 관계를 맺고 권력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들 위에는절대 권력자 교황이 있어,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종교' 아래 온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즉, 종교가 모든 일상의 중심이자 절대 가치가 된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중세를 종종 '암흑기'라 부르는데, 이는 르네상스 이 후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의 종교로 통일된 사상, 마녀사냥과 같은 비이성적이고도 광신도적인 일련의 사건들, 흑사병, 전쟁 등 중세를 어둡고 발전이 없는 이성과는 거리가 먼 시대로 중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각 지역마다 특색있는 미술과 예술이 발전했고, 학문과 철학도 활발히 논의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인본주의자'들에게 중세의 문화 사상은 '종교의, 종교에 의한, 종교를 위한' 것으로 그들이 계승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와는 다분히 반대의 것이었다. 게다가 르네상스 이후 자연 과학의 발전으로 근대 사회가 시작됨으로써, 중세는 근대적 시각에서 볼때 발전이 없는 암흑의 시기였던 것이다.
중세 미술에서도 그 중심에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와 교황의 힘이 여실히 드러나는 거대하고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이 대표적이다. 거대한 교회 건물은 종교적 교화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절제되고 단순한 성상 조각 또는 프레스코화나 스테인리스 창화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며져있다. 미술의 목적은 이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중세 시대 미술가는 인간이 아닌 신이 보기에 좋은 온전한 종교적 정신이 담긴 소상을 제작하는 것으로, 그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이자 신이 주신 능력이다. 아름다움(美)은 신의 영역이고, 미술가는 신에게 부여받은 능력으로 '모방'을 잘 하는 것 뿐이다.
또한, 로마시대 미술이 세속적인 가치를 대변하였기에, 중세 시대 초기에는 모든 세속적인 그림 제작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6세기 그레고리 교황이 성상화 제작을 허용함으로써 중세 미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레고리 교황은 예수와 성인, 성경의 주요 사건을 그린 성상화를 적극 도입하여 높은 문맹률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고자 했다. 이 후 8-9세기 성상화 제작이 교리에 어긋난다는 동방 기독교의 성상파괴운동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성상화가 신앙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 후 회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오직 절대 신 곧 창조주 만이 절대 선(善)이자 진리인 초월적 아름다움(美)을 감각할 수 있고, 인간은 신이 만들어 낸 것들 속에 내제된 아름다움(美)을 향유할 수는 있어도, 아름다움(美)을 재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까지 아름다움(美)에 대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 이후 거의 변화가 없었다. 미술가의 역할도 '모방가' 위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으니, 하물며 미술에 대한 인식이야 말할 것도 없다. 미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라 생각조차 하는 이가 누가 있었을까? 다만, 중세 시대에도 절대적 가치로서 아름다움(美)에 관한 논의는 존재했고, 그 중심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美)의 가치로 '통일성'을 중시 여겼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수는 만물의 근본적 원리다"라는 이론을 계승하여 '수'가 만들어내는 질서를 아름다움(美)의 가치로 보았다. 다양한 사물들이 수와 비례에 의해 균형을 맞추면 비로소 통일성을 갖추게 되는데, 이것이 곧 예술이나 자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美)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창한 통일성과 질서에서 오는 아름다움(美)은 고대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는 수에 의한 질서가 시각과 청각에 의해 구현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두 감각만으로는 규범적인 질서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눈과 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 마음이 내재한 형상을 파악하는 것은 오직 신의 계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듯 초월적 아름다움(美)는 중세 시대에도 항상 존재해 왔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美)의 속성을 두가지로 나누며 철옹벽같던 아름다움(美)의 초월적 지위를 미세하게 나마 허물었다. 그는 신이 모든 사물이나 대상에 부여한 아름다움을을 '객관적인 아름다움(美)'으로,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인지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주관적인 아름다움(美)'으로 보았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비례'를 중시 여겼다. 사물이 그 자체 기능에 적합하게 제작되었을 때 그 아름다움과 용도가 일치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질료와 형상, 본질과 존재, 이성의 정신적 빛과 어울리는 대화 행동에 나타는 정신적인 아름다움까지 그 비례 범위가 다양하다. 또한, 중세에는 신을 빛과 비유하여 명료한 색과 빛을 중시 여겼는데, 아퀴나스는 이 빛의 영역을 물질적 빛과 색, 사물을 인지하는 이성의 빛, 지상적 명성의 빛남, 축복받은 영광의 육체의 거룩하 광휘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표현한 예술가의 결과물은 아름다움(美)으로 향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가가 어느 면에서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다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중세 시대에서 매우 고무적인 주장이었지만, 아퀴나스 역시 당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창작 능력에 대해서는 묵과했다. 그에게도 예술가란 신이 만들어 낸 자연의 형상들을 재구성할 줄 아는 '모방가' 정도의 기술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신 중심의 철학을 고수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아름다움(美)을 향유하고 제작하는 인간의 자율성과 경험을 강조했다.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고 인간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사상을 "처음" 제시함으로써 르네상스로 나아가는 길목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