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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시간,떠나기 좋은 시간

매듭은 서서히 풀린다

by 페이칸

한잠 자고 났더니 바이칼 호수를 지나고 있다.

블러썸을 얘기한 게 엊그제였는데 그 바이칼 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

언젠가 보았던 모습, 언젠가 나눴던 이야기가 연상되듯 눈앞에 나타나면 왠지 모를 기대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으니

추억은 그래서 아주 건강한 자양분이 된다.

그런데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이 오히려 그 기억을 초기화시켜 버린 참사(?)를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봤을 것 같다.

그곳 칠암동 집 담장엔 무당의 시뻘건 깃발이 펄럭여야 했고

혜란이네 집 마당에선 내가 다니던 학교가 보여야 했고 셋방살이 엄마를 대신해 나는 혜란이가 얄미워 학교와 동네에서 만나기만 하면 칙칙 거리곤 했다.

그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나의 커다란 돼지 저금통은 빨간 배를 드러내 놓고 텅 텅~ 비어 있었다. 주인집 딸과 그 친구 들이었다.

정전이라도 되면 군용 플래시를 비취며 온 동네를 돌아 다니던 그 추억이 서린 곳을 어느 날 다녀오고서는 더 이상

추억보다 기억으로만 남게 되더란 말이다.

조지아,

집집마다 포도나무가 넝쿨로 널려 있고 거리엔 소련제

푸르공이 택시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저녁이면 은은한 수은등이 거리를 밝히던 동네, 조지아는 내게 다시 꺼내고 싶은 곳이 되고 있었다

'새벽 1시'

여행을 떠나기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한다.

하루종일 얽히고 쌓인 매듭이 서서히 풀리는 시간이고 깊은 잠에 들며 뇌를 초기화하는 시간이다.

이제야 떠날 준비를 한다.


방금 그러니까 어제 사고가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포루투 행 항공을 예약했는데 날아온 이메일에는 포루투가 아닌 리스본이었다 황당했다.

하다가 잠시 중단하면 입력된 데이터는 모두 초기화되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럽 내를 이동하는 budget항공은 홈페이지를 아무리 찾아봐도 전번이나 이메일 모두 찾을 수 없었다.

진짜 Budget스러운.......

그 흔한 이메일도 sns도 없고 ars 전번 하나뿐이라니... 그마저 ars전번은 쓸모가 없었고

그렇게 계속 찾다 보니 그들 역시 '좋아요(like it)'를 먹고

산다는 걸 알게 됐고 메신저로 자초지종을 적어서 보내 버렸다

새벽 세시가 다가온다...

전화가 울렸다.

'국제전화입니다~국제전화입니다'

벌써 답장이 온 건가?

‘네가 칸이니? 너의 예약을 확인했어'

'그래 내가 리스본 예약했는데 이건 너네 mistake야 mistake! 내가 아니고 너네 시스템 문제라고!

내가 그런 거 아냐 ~~!!! “

??? allo ~allo ~

플라멩코 말이야 플라멩코 예약 안 했어? 그라나다 플라멩코 말이야. “

항공사가 아니었다....

"아 쏘리 쏘리 내가 플라멩코 예약했어, 맞아 맞아 “

“근데 너 호텔에서 픽업 원하는 거니?”

“그래 픽업해줘야 갈 수 있어”.

“ok 그런데 픽업은 10시 타임만 가능하고 픽업 추가 차지 있어 “.

“얼만데?”

“인당 10유로.”

“헐 ~그냥 놔둬, 찾아갈게~~ 그냥 8시 타임으로 놔둬. “

“Ok 8시 , 파이널 보내줄게~~.”


그때 특유의 메신저 오는 소리~

'칸 네 메시지 봤어. 방금 전에 예약했더군

리스본이 아니고 포루투로 가야 하는 거구나.

Same day similar time 맞지?

그래, 페널티는 없을 거야 단 fare차액이 7유로

있어서 전화로 카번 주거나 아님 네가 날 믿으면

여기에 카번 남기면 처리해 줄게...'

다행이었다.

잠시 카번 줄까 고심하다 여차하면 해지해도 되는 카번을 주었더니 제대로 된 티켓이 메일로 배달됐다.

이제야 한시름 놓고~~

새벽 세시였다.

그제야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6시엔 나가야 한다.

잠이야 구름 위에서 자면 되겠지.

이번엔 배낭 버리고 처음으로 캐리어를 준비했는데

도대체 뭘 넣을 게 없다.

내게는 너무 큰 가방... 텅 빈 공간들.

뭘 넣지? 두리번두리번...

아마도 빈 공간이 있으면 뭐라도 채워 넣게 되는가 보다.


인천공항엔 막바지 여름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고 있다.

여긴 예전에 방사능 야적장이 있던 곳이 라지...?

S7 항공의 허브 공항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잠시 후엔 바르샤바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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