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 VS 잘할 수 있는 것)
벌써 햇수로는 2년 전이다. 23년 10월쯤 영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한 이후로 쭉 궁금해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팬심도 한몫했지만 영화 타이틀이 주는 호기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높은 궁금증에 비해 영화를 접한 건 늦었다. 또한 영화를 감상한 이후 후기를 쓰기까지의 간극은 1년도 넘는다. 어쩌면 주제가 주는 무거움과 내 인생의 시기가 겹쳐서 이 영화에 대한 리뷰가 1년 이상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접하기 전에 동명의 원작 소설과 만화를 차례대로 읽었다. 원작은 사회생활(학교)을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생기는 일상의 부조리 그리고 그 부조리에 대한 개인의 대응과 방향성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방식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한 번은 읽어볼 수 있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는 따분한 부분이 있었고 이것이 어떻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에서 그려졌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름만 같은 아예 다른 작품이었다. 다만 주제의식 측면에서의 동질성이 눈에 띄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섬세하고 외로운 아이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고, 그가 백발의 거장이 되어서 그 위로를 다시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던 점은 아이들이 영화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점이다. 오히려 불혹에 가까워도 미처 성장하지 못한 어른에게 더 깊게 다가간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각각의 연령에서 이 영화를 어떻게 감상했을지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되는 것이고 최소한 나라는 사람에게는 2년에 가까운 질문을 던져줬다는 점에서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힌다.
영화의 메타포에 대한 해석이나 주제의식과 같은 부분은 유튜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정말 유튜브의 순기능도 많다. 이전에는 대학 강의실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예술 작품의 철학적 감상이나 전문적 분석을 약 10여분 밖에 되지 않는 무료영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알고리즘의 편향에 대한 문제가 크게 자리하고 있지만 어쨌든 기술은 명과 암이 있다는 측면에서 밝은 면이 강하게 보인다.
어쨋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다 주제에 대해서 내가 고민한 2년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 조금 가치있는 일이 될 것 같다.
영화의 큰 틀은 마사토(주인공)의 삼촌 할아버지가 차곡차곡 쌓았던 세상 너머의 세상에서 주인공이 겪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삼촌 할아버지는 주어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영재다. 어렸을 적부터 학문적으로 매우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응당 그러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그러하듯이 기이한 구석도 가지고 있다. 기이한 구석은 현실에서 이해받지 못할 부분으로 나타나게 되고 타고난 자질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결국 세상과 할아버지의 거리감이 외부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외부의 세계에 틀어 박혀서 그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삶을 선택한다. 우연한 계기에 할아버지의 세계에 같은 피가 흐르는 마사토가 발을 들이게 되어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될지 아닐지를 두고 이루어지는 판타지다.
크게 두 가지 전제에 주목한다. 같은 피라고 표현되는 타고난 재능 (잘하는 것)과 그 재능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세상(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부분이다. 이제 두 아이의 아빠라서 그런지 타고난 것에 대한 경험적 믿음이 쌓여간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가 다르듯이 우리 모두 아예 다른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 사고에 능하고 어떤 사람은 감정적 공감이 깊다. 이런 부분은 노력도 중요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 특성을 명확하다. 물론 좀더 크게는 학문 혹은 예술이라는 부분으로도 확장이 가능하다. 처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말은 많은 사람의 동기부여를 빼앗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 한 부분이라면 나머지 한 부분은 인생 전체에 흐르는 경험에서 비롯된 방향성이다. 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시간 축에 따라 경험하는 내용과 때때로의 우연성에 따라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방향성은 계속해서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한번 불이 붙은 방향성 직선 위로는 아예 다른 결과가 흐르고 있다.
결국 영화도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다른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마사토의 어머니가 화재로 인해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장면은 정말 강력하게 그려졌다. 불길이 칫솟는 거리를 휘저으며 엄마가 있는 병원을 찾아 헤매는 마사토의 모습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마사토의 인생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흐르는 새어머니의 돌봄 그리고 아버지의 거친 관심들이 마사토의 인생의 서사로써 쌓여간다.
삼촌 할아버지의 서사는 깊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다만 외로웠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그도 그의 서사로서 살아온 것이다. 같은 피가 흐르는 두 사람이지만 결국 선택은 다르다는 것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삼촌할아버지가 '미야자키 하야오', 만들어진 세계가 '그의 작품세계'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백발의 거장은 다음 세대에 같은 피(섬세하고 예민하지만 재능 있는)가 흐르는 작가들에게 말하는 메시지가 보인다.
'당신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나처럼 살 것인가, 당신들의 서사에 의해 살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좋다고 생각하네. 다만 어떤 삶에도 명암은 존재하고 나는 지금까지 꽤 외로웠다네.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세계는 역할을 다 한 것 아닌가? 나의 세계의 균형은 지금 깨뜨려도 좋다고 생각하네(극 중 세계는 균형을 읽고 무너진다). 어차피 다른 멋진 세계가 또 올 것이니까 '
잘하는 것은 타고난 것이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잘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뭘까? 잘하는 게 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잘할 수 있는 것'은 '잘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의 힘으로 이어지는 방향성의 끝에 있는 이미지다.
매일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내 고등학교 친구 A는 정말이지 재능이 1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작가가 되고 싶어 했었고 지금은 문학 작가는 아니지만 기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아마도 그의 피에 흐르는 예민함은 부족했지만 삶의 서사에서 발생한 일련의 경험이 그를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이끌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40이 다 되어가는 겉늙은 어른도 매일이 분명하지 않다. 특히 무엇을 바라보고 전진하는가? 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주변에는 성공 사례가 들려오고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고 한다. 특히 AI의 등장은 지적 노동에 대한 종말처럼 들리기도 하는 세상이다. 먹고 살 생각을 하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먹고산다는 것 이상의 삶. 50년 100년이 지나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기술에 있지 않다. 세상이 혁신적으로 변해서 우리는 생산하지 않고 풍족한 배급만 받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서사가 끊긴 삶에서 의미를 찾다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계속해서 경험을 통해 서사를 만들고 '잘할 수 있는 것'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마치 주인공은 1명처럼 보이지만 극 중 많은 등장인물을 1인칭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모두 하나하나의 영화가 된다. 물론 흥행이 잘되는 영화도 안 되는 영화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록으로 남겨지고 결국 잊혀진다.
영화에서 삼촌 할아버지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지만, 마사토의 세상은 이제 만들어지는 것처럼 계속해서 나만의 서사로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앵무새가 돼버릴 수 있으니 (영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