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글을 쓰고 싶은 날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펜을 들었는데, 아뿔싸! 지금 이 순간에도 쓰는걸 바로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포기는 나의 친구요 꾸준함은 나의 적이다. 내 인생에서 포기한 것들을 이야기하라하면 긴긴밤을 지새울 수 있으나 꾸준한 것들을 이야기해보라한다면? 글쎄요, 나는 바로 포기해버리고 말 것이다. 참으로 포기(Foggy)한 날이다.
2021. 05. 04
어려서부터 포기는 마땅히 금기시되었다. 하물며 '다 포기하지마'라는 유행가도 있지 않은가. 노래 덕인지 도날드 덕인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치킨만큼은 절대 포기 못하고 있지 않은가. 닭고기 아줌마, 닭고기 주세요. 도날드 덕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꽤나 말 잘 듣는 아이였음에도 포기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맛깔나는 배우가 되고 싶었던 고등학생은 연극부를 탈퇴했고, 김봉두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대학생은 임용준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 손잡고 이촌까지 찾아간 차범근 축구교실을 역시나 빠르게 퇴장했다던가 혹은 일본어 중간고사 100점 이후 기말고사 15점을 맞아 왜구를 소탕했던 자잘한 포기들은 차마 말하기도 부끄럽다, 스미마셍.
큰다고 달라질쏘냐. 무위자연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되고자했으나 자본주의에 굴복해 월급만 축내고 있고, 그럼 책이라도 내보자던 작가 지망생 양반은 유튜브로 뻐꾸기나 보고 있으니 나 원 참 지나가던 뻐꾸기가 비웃겠구나, 뻐꾹.
숱한 포기들이 다타버린 재마냥 내 몸 어딘가에 쌓여있는 기분, 결국 잿더미가 되어버린 한 때는 활활 타올랐었을 불꽃들.
후후. 그 잿더미들을 불어내 마음 속 후회와 아쉬움을 날려보내자. 비록 배우는 되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 감동할 줄 알게 되었고, 게하 주인장은 되지 못했지만 해방촌 작은 빌라에서 에어비앤비 슈퍼호스트도 되어봤다. 요란하게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는 직장동료들을 만났고, 어쩌다 포털 메인에 내 글이 올라보기도 했다. 콩그레츄레이션 결혼도 했고(구 비혼주의자), 홈스윗홈 집도 장만했다(구 무소유수행자).
불어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것들은 포기했다는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성공들이자 큰 행복들이었다.
반칠순인 지금도 하루하루 차곡차곡 포기를 모아가고 있고, 아마도 한줌 재가 될때까지 포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를 포옥 안아주고 싶은 포기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