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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Jun 16. 2020

지뢰밭

우리 동네에는 지뢰가 있다.

다들 알다시피 비유다. 우리 동네에 지뢰가 몇 개 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았다.  주 1~2회 정도 갑자기 정신이 드는 날 카페에 간다. 오늘도 변함없이 느긋한 일상에 바짝 채찍질을 하려 카페에 왔다. 이 카페는 콘센트 있는 자리가 너무 소중해서 음료를 주문하기 전 자리를 맡으려 2층으로 향했다.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콘센트 자리로 다가간 순간 어제 막 친구가 헤어진 그의 엑스가 앉아있었다. 친구의 엑스라는 것보다 더 놀라게 했던 점은 이 엑스가 원래 이런 프랜차이즈 카페에 다니는 사람이었나, 하는 것. 내 편견 때문에 이 친구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버젓이 앉아있다니. 콘센트 자리는 애매하게 남아있어 오랜 시간 마주 앉아있고 싶지는 않아 의자가 편한 자리를 잡았다. 곧바로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냈더니 당당하게 굴어서 엑스가 도망가게 하라는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 근처 유일한 세탁소도, 가끔 서 있는 버스 정류장도, 전에는 단골이었던 식당에도 그 친구의 엑스들로 점령당했음이 떠올랐다. 이게 지뢰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친구에게 말하자 'ㅋㅋㅋ' 이 말로 메신저 창이 가득 찼다.  


단골이었던 식당이 그 첫 지뢰였다. (이하 지뢰 1) 오랜만에 셋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와 여운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후다닥 횡단보도를 건너 저 멀리 뛰어갔다. 남은 나와 다른 친구는 황망한 표정으로 친구를 쳐다보았고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렸는데 아뿔싸! 그곳에 지뢰 1이  밥을 먹고 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고 나는 다른 친구의 팔짱을 끼고 도망간 친구에게 향했다. 친구가 도망갈만한 이유는 분명했다. 커플티를 입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가 디저트를 두 접시나 시켜 먹으면서 친구가 느낀 순간의 공포심을 들었다.


집 바로 앞 세탁소가 없어지며 조금 멀리 있던 세탁소가 동네 유일한 세탁소가 되었다.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할 때 이용하는데, 그 집 아들이 지뢰 2다. 다행인지 뭔지 친구와 헤어진 후 마주친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는데 특히 주말이면 그 불안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도 아는 그 집 아들은 종종 세탁소에 갈 때마다 일을 거들고 있어 기억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지뢰 2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할 때부터 불안했다. 아, 내가 부모님을 대신해 세탁소를 가는 일은 이제 없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일 중 하나가 되었고 언젠가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민했는데 마스크를 끼고 다녀서 그 고민은 덜었다.  


아빠와 외식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남자친구가 버스를 타고 귀가하다가 나를 봤다는 것이다. 대체 너의 남자친구들은 어딜 그렇게 쏘다니길래 날 자꾸 보냐고 웃으며 받아친 적이 있다. 지뢰 3은 술을 좋아해서 차를 끌고 왔다가도 버스나 택시로 귀가하는 사람이었다. 내 친구와 달리 엄청난 친화력을 가진 그는 내게 반말을 쓰라고 종용(?)했다.(본인은 존대를 쓰고, 나만 반말을 하라니! 너무 이상했다.) 겨우겨우 매번 거절했었는데 어느 날 헤어지고 보니 존댓말을 계속 쓴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그는 가끔 그 노선을 이용한다고 했다. 코로나 시대에 도래하며 재택근무와 동네 산책 정도만 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다.  


친구는 매번 성급하게 애인을 보여주는 자신을 했다. 여러가지 따지고드는 자신이 예민한건지 말이다. 자책하는 친구를 보느니 그 순간을 하나의 에피소드화 하기로 했고, 앞으로도 지뢰를 함께 밟아보기로 했다. 몇 년에 걸쳐 벌어진 이 우연을 그냥 받아들이는게 좋을 것 같다. 잔잔한 일상 속 가끔 조금 어색한 상황이 벌어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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