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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Jun 22. 2020

여름의 맛

지금, 당신의 여름밤은 어떤가요?

몸을 가누기 힘든 아침이었다. 잠이 끝없이 오는데 자면 잘수록 피로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자꾸만 어딘가로 가라앉는듯했다. 며칠 밤샌 것도 아니고, 강도 있는 육체노동을 한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몸을 일으켜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생리를 시작했다.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갈수록 요란하면 요란했지 덜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몸이 무거워지는 건 또 새로웠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상태가 하루 하고도 반나절 동안 계속되었다. 밥을 먹고, 침대에 누운 시간만 쌓인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찌뿌둥했다. 몸을 조각조각 나누어 하나하나 바르게 펴서 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어중간한 길이로 들어선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다.


요가매트와 폼롤러를 방으로 가져와 세팅했다. 방안은 왠지 모르게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한낮의 요가를 시작했다. 아주 더운 날 하는 요가의 장점이자 단점은 땀이 쉽게 난다는 것. 오늘은 그걸 장점으로 채택했다. 15분짜리로 할까, 아니 이왕이면 40분짜리로 해보자. 평소 자주 접했던 한 요가 채널에서 코어 근육을 중심으로 한 40분 세션을 시작했고, 20분이 넘어가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평소 같으면 땀이 맺힐 때 멈춘다. 하지만 오늘은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요가의 끝은 매트 위에 누워 숨을 고르는 것. 바람과 바람 사이에 몸을 뉘어놓은 것 같았다. 온몸은 땀으로 뒤덮였는데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깨어난듯했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샤워까지 마치니 어느새 일요일 오후인 지금이 아쉽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시장에 가서 장을 봤고 저녁 준비를 했다. 준비하는 동안 물에 적신 컵과 맥주를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차디찬 잔에 맥주를 따라 목으로 넘기는 순간 짜릿했다. 오래오래 즐기고 싶어 그 작은 캔을 천천히 조금씩 마셨다.  


세계달리기의 날, 세계음악의 날, 올해 마지막 일식이 일어난 날, 하지 등 오늘은 많은 의미가 담긴 하루였다. 그중 하나의 의미는 제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세계음악의 날이었다. 우연히 요가를 마친 직후 발견한 조수미씨의 공연이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 스트리밍된다는 소식을 발견한 덕분이다. 하루를 되짚어보며 마무리하기 적당한 저녁 시간이었다. 알림 설정을 해두고, 시간 맞춰 유자청 에이드를 만들어 노트북 앞에 대기했다.


시원하고 달달한 유자청 에이드와 조수미씨의 음성, 이어지는 사계 연주까지 들으니(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그 장면도 떠올랐고!) 딱 내가 바라던 여름밤을 맞이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어지는 들뜬 마음. 꼭 혼자 있는 공간에서만 그릴 수 있었던 풍경을 부모님의 집에 있는 내 공간에서 맞이하니 새로웠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원하는 삶을 그려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좋아하고 원하는 모습의 여름밤은 생각보다 싱겁게 이루어졌다. 그게 어디서든 내가 원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거였다. 무더위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맺히는데 그것조차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꿉꿉함.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곧 서늘한 여름 바람을 느끼고, 느지막이 지는 해를 보며 걷고, 얼린 컵에 담긴 맥주를 여유 있게 맛볼 수 있다. 여름의 구석구석 살피지도 못했는데 흘러가는게 아쉽다. 역시나 달뜬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 오늘도 땀 흘리며 움직인다.


참 좋은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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