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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May 18. 2022

모른 척하고 싶어서 그랬다

지나고 나면 다 에피소드 | 내 일상의 모든 이야기는 글감이 된다


감히 한 달 살기를 꿈꾸며 여행을 준비했다. 옷은 최소한으로 챙기고, 생필품을 주로 담았다. 샴푸, 모기약, 세제 같은 것들. 여행자 보험도 길게 잡아두며 만전을 기했다. 태국에 입성 후 방콕에 있다가 치앙마이로 옮겼다. 치앙마이에서 다들 한 달 살기를 한다길래, 얼마나 살기 좋으면 그럴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닐 여력이 없을 것 같아 올드타운에 자리 잡았다. 지나가는 버스 보기가 힘들고 택시와 같은 썽태우가 있긴 하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다만 몇 가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둘러보았다. 요가를 하려니 없어지거나 비정기적인 원데이 클래스, 별로 남지 않은 시간표 같은 것만 확인했다. 도서관은 멀지만 대신할 공간은 알아두었고, 달리기는 임시 숙소에서 바로 보이는 큰길을 따라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다 요가 매트 깔 자리 없는 임시 숙소를 벗어나고 싶어 다음 숙소를 알아봤다. 크게는 총 세 곳이고 미리 점찍어둔 숙소를 오고 가는 길에 무작정 숙박업소에 들러 한 달짜리 방이 있는지 물어봤다. 발코니 너머 보이는 풍경이 좋은 곳, 수영장이 있는 곳, 찜해둔 장소들 근처에 있는 곳까지. 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특히 수영장이 있는 곳은 좋아 보였다. 직원들이 에어컨 세게 틀어둔 사무실 안에 있는 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더위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때 쇼핑몰에 가 점심을 먹었다. 낮잠을 거하게 자고 난 뒤 일어나 노트북 들고 동네 맥주집에 갔다. 노트북을 펼치자마자 이런 느림은 내게 아직 필요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요 며칠 생각했던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답이 정해졌다. 정답이 아니라, 바로 다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마음이 편할지에 대한 답. 노트북을 덮고 맥주 한 잔에 팟타이를 한 그릇 해치웠다.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난 나를 너무 몰랐지, 모른 척하고 싶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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