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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May 21. 2020

너는 그러려고 대학 나왔니?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모두 말의 위력을 알려주는 속담이다.

그만큼 말 한마디의 힘은 크다.






시어머니는 말로 모든 공을 까먹는 분이시다. 아무것도 안 하시면 마음껏 미워라도 할 텐데 이것저것 챙겨주시면서 상처를 주시면 마음껏 미워하기도 어렵다. 내게도 역시 누구에게나 그렇듯 늘 말로 공을 까먹으셨다. 20여 년 넘게 살면서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늘 흐림은 아니었다. 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시간이 흘러 '말투가 그러신 분이구나.'라고 이해하며 어느 정도는 흘려 넘길 수 있는 사이는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심한 내 성격상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새겨져 깊은 상처가 되는 말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그 시절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하듯 시골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하시고 가난한 살림을 돕기 위해 일을 하셔야 했다. 그렇게 자라 지금의 시아버지를 만나고 숟가락 두 개 들고 결혼을 해 두 분의 힘으로 가정을 일구시고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워내셨다. 이전에는 당연히 부모라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일들이 결코 당연하지도, 쉽지도 않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성실하게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나는 시어머니를 존경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부러운 것은 60세에 일을 접으시고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사실 수 있는 노후 준비가 되셨다는 점이다. 지금과는 다른 열심히 일하면 밥은 먹고살 수 있는 시대였다고는 해도 '참 열심히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그만두신 후 시어머니는 오랫동안 심심풀이로 한글을 배우셨고 내 권유에 따라 초등 검정고시를 보셨다.(검정고시를 권했다고 형님에게 혼났었다. 눈도 안 좋으신데 왜 그런 걸 권하느냐고.. ^^) 40대가 되기도 전에 문고리 잡고 30분인 나는 그 연세에 공부를 하시는 시어머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으신 것은 아니셨지만 만일 어린 시절 공부를 제대로 하셨다면 분명 잘하셨을 꺼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노후를 보내고 계시지만 시어머니는 늘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 분노를 자식들에게 푸셨다.


결혼 후 아이들 키우며 살림만 하는 나를 보실 때마다 시어머니는  그러려고 대학 나왔니?”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어머님이 대학 보내신 거 아니신데 무슨 상관이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한 번도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시어머니의 성격상 그리 말하면 분명 자신을 무시한다고 받아들이셨을 테고 지금보다 더 서슬 시퍼렇던 시절이라 아마 온 집안이 난리부르스가 났을 터였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봐야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내가 나의 생각을, 싸움을 각오하고 말했더라면 지금 시어머니와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번은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툭하면 나한테 '넌 대학 나와 왜 그러고 사냐?'라고 하신다. 들을 때마다 기분이 그렇네.”

남편은 미안한 듯 웃으며

“그냥 그런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엄마가 말이 좀 그러시잖아. 나쁜 뜻은 아니실 거야.”

남편도 딱히 할 말이 없었을 거란 걸 안다. 누구의 편을 들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대학을 나와 주부로 살아가는 것이 시어머니께 그런 소리를 들은 일인가 싶어 늘 맘이 답답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고 지금의 알바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내 건강과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일이었다. 미래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 가족은 만족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을 이용해하는 일이라 가사나 육아에 큰 지장이 없었고 아이 학원비 정도는 벌 수 있으니 한참 아이들에게 돈이 들어가야 하는 시기에 조금이나마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남편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집에만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 사람도 만나라며 응원해 줬지만 시어머니는 달랐다. 일을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시어머니의 첫마디는 "그래서 월급은 얼마나 받니?”였다.

“아이들 학교 나가는 날에 3시간 일하는 거라 얼마 못 벌어요.”

“그래? 무슨 일을 하는데?"

"학교에 문방구 같은 거예요. 복사도 하고 코팅도 하고 선생님들이 부탁한 자료도 제작하고.."

"그래? 그렇게 일하고 얼마나 받니?”

궁금할 수도 있는 일이고 별생각 없이 인사치레로 묻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남편의 월급은 얼마인지, 저축은 얼마나 하고 있는지, 빚은 얼마나 갚았는지, 아이들 학원비는 얼마인지와 같이 우리 집 경제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시는 시어머니인지라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늘 감시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싸워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란 걸 경험으로 아는 터라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드렸다.

“일 3만 원씩 년 600만 원 벌어요.”

“세상에. 겨우 그거 벌어? 사람을 거저 쓰려고 하네. 근데 넌 대학 나와 그것뿐이 못 하니?







다시 원점이었다. 돈을 벌어도 벌지 못해도 시어머니에게 나는 대학 나와 그것뿐이 못하는, 참 별 볼일 없는 며느리였다. 아마 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다면 남편 말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거나 시어머니에게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자존감이 바닥이던 나는 싸울 힘도 무시할 힘도 없었다. 그저 마음속 깊숙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쌓아가고 있었을 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시어머니의 말들이 어머님의 열등감과 피해의식 때문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미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빠진 시어머니와 자존감이 바닥인 며느리의 조합은 최악이다. 그 시절 나는 왜 그토록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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