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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May 25. 2020

세상에 이런 형님 또 없습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의 여름휴가는 당연한 듯 시댁이었다. 명절 일주일, 5월, 10월 연휴, 여름휴가 일주일은 당연한 듯 시댁으로 향했다. 거기에 여름방학과 크리스마스부터 신정까지는 시어머니가 조카들과 우리 집으로 오셨으니 멀리 산다는 말이 무색하게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큰 아이 학교 친구 엄마들과 이야기를 하다 “시댁 가요.”라고 하면 저절로 “또 시댁? 서울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주 가.”라고 할 정도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늘 “너네가 오면 1년에 몇 번이나 온다고.”를 입에 달고 사셨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품 안에 자식을 떼어놓으셨으니 허전한 맘에 그러시는 것이리라 이해했다.


지금은 며느리에게 시댁이, 시어머니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남편이지만 결혼 초에는 달랐다. 시댁이 친정보다 편한 것 아니냐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변해온 남편을 보면 그 당시 남편의 이런 뇌 구조가 이해가 된다. 친구들 중 결혼이 가장 빨라 결혼 생활에 대해 비교할 대상이라곤 시아주버님이 유일했기에 명절에 친정을 가지 않는 것도, 휴가를 시댁에서 보내는 것도 다 형님네가 기준이 되었다. 자신이 아는 유일무이한 며느리인 형수가 하는 것이 곧 세상 모든 며느리가 하는 일로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나의 친정아버지는 결혼하면 여자는 그 집 귀신이라는 조선시대 봉건주의 사상을 가지고 계셨고 상견례 자리에서 시어머니의 성향을 단박에 알아차리신 친정어머니는 행여 기울어진 결혼으로 딸이 시어머니의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시댁에서 하는 일에 대해 어떠한 불편한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철없던 나 역시 시어머니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남편과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단 한 번도 이 우스운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한 것처럼 하기를 10여 년.






시댁에서 늘 집순이로, 나의 임무(?)에 충실하게 시어머니의 말동무를 하고 지내던 어느 해. 휴가였는지 추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형님과 바닷가 포차에서 술 한잔을 할 기회가 생겼다. 관광지이지만 난 단 한 번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곳. 나는 사람들이 휴가를 즐기러 오는 그곳에 늘 있었지만 늘 TV에서만 그곳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곳에 내가 직접 가 있었다. 밤바다. 그리고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속에 자신의 형수라면 껌뻑 죽는 남편과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시는 형님과 나, 그렇게 셋이 마주 앉았다. 한 잔 두 잔 술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던 도중 형님이 남편에게 말씀하셨다.


“삼촌, 삼촌은 휴가에 여기 오는 거 쉬러 오는 거라 생각하죠? OO 이는 여기 오는 거 휴가가 아니에요. 아세요?”

“...”


아니라고, 무슨 소리냐고 할 줄 알았던 남편은 술잔에 시선을 맞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남편과 나는 휴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휴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휴가 날짜를 언제로 할 것인지였지 이번 휴가를 어디로 갈 것인지는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휴가를 시댁으로 가는 것이 남편에게는 당연한 일이고 설레는 일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나의 유일한 장점이 무식할 만큼 참을성이 강하다는 것이었고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한 일이라는 믿음이 있어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모를 정도로 참아내고 있었다.






“OO 이한테 잘해줘요. 휴가 내내 시댁 식구와 지내는 거 쉬운 거 아니에요. 게다가 명절이면 당일 새벽에 얼굴만 쏙 내밀고 가는 며느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OO 이는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미리 와 일 도와주잖아요. 그게 난 너무 고마워요. 그러니까 삼촌도 잘해줘요.”


생각지도 못한 형님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형님도 며느리시고 어쩌면 나보다 더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고 계신 분이셨다. 그런데 그런 형님이 나에게 고맙다시며 철없는 시동생에게 철없는 동서를 부탁하시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시댁에 갈 때마다 약을 챙겨가야 했던 내 마음이 위로를  받던 순간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그때의 형님 말씀 덕분에 나는 시집살이를 버텨낼 수 있었다. 드라마 속 한 장면 같던 그 날이 오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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