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이 말했다.
“엄마한테 마스크 보내드렸어?”
지난번 어버이날에 내게 다른 집들은 며느리들이 마스크를 사서 보낸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제야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니.”
방을 나서는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 우리 산 거 100매 사서 보내던지 해야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니가 진작 좀 보내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땐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불편하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쓸데없이 예민한 나 자신이 싫은 순간이다.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마스크를 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예전 같으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마스크를 사서 보내고 미처 생각지 못해 죄송하다, 시어머니 맘이 풀리실 때까지 석고대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번에 건강 마스크를 구입할 때도 남편에게 “어머니께 100매 보내드리면 어떨까. 형님네랑 한 박스씩 나눠 쓰시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하지 읺았다. 어차피 지금 마스크를 보내도, 보내지 않아도 나는 욕을 먹는다. 보내면 시어미가 꼭 말해야지만 보낸다 타박하실 테고 안 보내면 당연히 말을 해도 안 보낸다 타박을 하실 테니까. 미처 생각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다. 마음이 멀어지니 생각이 멀어지고 행동은 더 멀어진다. 처음 며느라기 시절을 멈추려 했을 때 며느리의 기본 도리는 하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며느리의 기본 도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준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예전의 그 기준을 기본이라 생각하셨고 나는 아니었다. 교집합이 없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이런 나로 인해 남편이 불편해한다는 걸 안다. 시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사이의 공기가 어색해진다. 그게 싫어 남편은 이제 내게 시어머니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시댁에서 점점 더 며느리가 아닌 남편의 동거인이 되어 간다는 걸 남편은 알까? 씁쓸하다. 가끔은 예전의 며느라기 시절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나 역시 지금의 상황이 편치 않다. 하지만 독기 어린 말들에 내마음은 아직도 끊임없이 상처 받는다. 나를 상처입히지 않고 시어머니와 잘 지내는 법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