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거의 생일날만 전화하는 조카였다. (시어머니의 전화 스트레스 때문에 우리는 모두 전화 거부 반응이 있다.) 다음 주 시어머니의 생신에 남편이 오는지를 묻는 전화였다. 시어머니가 조카에게 물어 조카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왜? 매주 자신의 아들과 전화를 하면서 정작 연락하지 않는 조카에게 그걸 묻는 거지? 이유는 안다. 직접 묻는 것보다 확실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우회해서 물으면 압박을 더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 나와 통화하실 때도 늘 내게 물으셨다. 이번 명절엔 언제 오냐고, 이번 휴가는 언제냐고, 이번 연휴엔 뭐할 거냐고..
7월에 딸 병원과 아들 자취방 이사로 이미 3일이나 연차를 쓴 남편은 시어머니 생신에는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조카 둘이 교대로 전화를 하니 안 갈 수가 없다. 말은 봐야 한다고 했지만 한 번에 거절하지 않고 여지를 남겨두는 건 마음이 움직였다는 의미다. 나는 올해 등교 개학 연기로 근무 일수 때문에 쉬기 어렵고 딸은 기말 시험이 시작되기 때문에 갈 수 없다. 불똥이 종강한 아들에게 튀었다. 금, 토, 일 약속 잡지 말라는 말에 아들의 얼굴이 안 좋아졌다.
차별받는 딸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아들 역시 시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왜 할머니 생신에 가야 해?”
“넌 시간이 되니까 그렇지. 사이가 안 좋아 그렇지 할머니 생신에는 가는 게 당연한 거야.”
“왜? 내 부모도 아닌데?”
“아빠의 엄마잖아.”
“아빠가 나 데려가려는 거 다른 이유잖아. 나 할머니 집에 데려다 놓고 아빤 친구 만나러 나가려고 그러는 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이가 참 버릇없다 할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겪어 본 사람은 버릇없다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안다. 아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란 것을 안다.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란 것을 알기에 심술을 부리는 거다.
남편은 시어머니와 한 시간을 같이 있지 못한다. 그래서 시댁에 가면 늘 우리이게 시어머니를 맡기고 자신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시어머니와 단둘의 시간은 힘들어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만 힘들면 되는 문제였는데 아이들이 크면서는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시어머니 한 분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함께 있음 늘 불편하니 아이들이 피할 수뿐이 없고 그걸 아는 시어머니는 늘 서운하다며 화를 내시니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그래도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이전보다 아빠도 많이 나아졌잖아. 집에 있는 시간도 길어지고.”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예전보다 나아졌으니 우리가 무조건 이해해야 해? 나아졌다고 해도 맞는 행동은 아니잖아.”
아들의 말에 더 이상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문득 <며느리 사표>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며느리라는 역할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저자의 성숙 과정을 담고 있다.
며느리 사표라는 말에 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나는 그래도 살 만 하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어머니께 며느리 사표를 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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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며느리로 한 게 뭐 있다고 사표냐?” 하시겠지.
내가 저자처럼 대가족의 맏며느리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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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결혼을 안 했을 거야.
만일 남편이 외도를 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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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이혼이지. 참는 것 따윈 없어. 경제력? 흥!! 그따위 꺼~~
비교하다 보니 내 처지가 저자의 처지보다 좋아 보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위안 아닌 위안을 느끼며 왠지 맘이 불편했었다. 예전 같으면 '그래, 저 정도는 돼야 며느리 사표를 내지. 난 그래도 나은 편이야.' 라며 다시 며느라기로 돌아갈 이유를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왠지 모를 마음의 불편함은 아들과의 대화 속에서 알았다.
예전만큼 시댁에 안 가도 되고 예전만큼 전화하지 않아도 되고 예전보다 남편이 알아주잖아. 예전만큼..
'예전만큼'이 문제였다.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해서 아닌 것이 맞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른 이보다 내 처지가 나아 보인다고 해서 아닌 것이 맞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아닌 것은 총량과 상관없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