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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Aug 05. 2020

시어머니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다

나는 냉혈한 며느리인가?


근 한 달 가까이 가슴에 돌을 하나 얻은 듯한 답답한 일이 마무리되었다. 끝나고 보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미 2주 전부터 자신의 생일에 올 것인지를 돌려 돌려 묻던 시어머니. 결국 남편은 갔다. 2주 전부터 오라는 신호를 그렇게 보내시더니 정작 연차를 내고 간다 하니 비도 오는데 뭐하러 오냐며 딴소리를 하셨다. 이미 연차를 냈다 하니 그럼 그냥 집에서 쉬라신다. 참..


등교하는 딸에게 전날 미리 이야기를 했다. 아침 등교하면서 짧게 통화하라고. 하기 싫어서 학교 끝나고 해야지 하고 미루면 더 하기 싫고 늦게 전화했다, 싫은 소리만 들을 테니 미리 전화하는 게 낫다고.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등교시키기 전 아이에게 전화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통화를 하고 나에게 전화를 넘기려기에 얼른 막았다.


“난 데려다주고 와서 할게. 또 남의 전화 넘겨받아 통화한다고 욕먹는다.”

지난 어버이날 남편 통화 후 전화 넘겨받아 인사드렸다 된통 욕을 먹은 터다.


아이에게는 미루면 더 하기 싫으니 얼른 하라고 했지만 정작 미루고 하기 싫은 건 나였다. 그걸 아는 남편이 얼른 전화드리라 재촉하며 출근했다. 어버이날 이후 통화를 안 했으니 어떤 반응일지 대충 상상이 갔지만 말 그대로 대충의 상상이다. 시어머니의 반응은 예상과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유도 없이 하루에도 열두 번 바뀌는 시어머니의 기분에 우리는 늘 대응에 실패한다.








첫 통화 시도. 산책을 나가셨는지 집전화도 핸드폰도 받지 않으셨다. 1시간쯤 후 다시 시도. 시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셨다. 시어머니가 “여보세요?”를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시어머니는 내가 전화를 걸면 먼저 “여보세요?”라는 멘트를 꺼내지 않으신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틀에 한 번 전화를 드릴 땐, 일주일에 한 번 전화를 드릴 땐 그러지 않으셨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바로 대답을 안 하시는 건 당신이 나보다 윗사람이고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으로 내 전화번호가 부재중에 찍히면 절대 다시 전화하지 않으신다. 자신이 받지 못한 내 전화는 존재하지 않는 전화다. 재미있는 건 남편의 전화를 못 받으신 경우에는 다시 하신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까 전화드렸는데 안 받으시데요.”

전화가 늦었다 화를 내시기 전에 미리 내가 전화를 일찍 드렸다는 걸 어필부터 했다. 이럴 경우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럼에도 여전히 퉁명스럽게 목소리 깔고 윗사람임을 알리며 시작하거나 “어~” 하고 목소리톤이 올라가시며 기분이 살짝 좋아지며 시작하거나. 전자인 경우는 하루 종일 집에 계셨거나 뭔가 맘에 들지 않는 일로 인해 기분이 안 좋으신 경우고 후자인 경우는 특별히 그날 기분 좋은 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으셨던 경우다. 이 날은 절반이긴 하지만 당신의 생일 때문에 식구들이 온다는 것과 궂은 날씨 덕분에 다행히 후자에 해당되는 날이었다. 날이 좋았다면 먼 길 오는 노고가 반감되었을 텐데 호우 경보가 내려진 날이라 시어머니의 기분이 좋았다. 힘들게 가면 갈수록 시어머니는 좋아하신다.


“어~~ 요 앞에 복도 걸었다.”

“비 오기 전에 산책 나가신 줄 알았네요.”

“비가 추적추적 온다. 거긴 안 오냐?”

“어제는 비바람이 태풍처럼 오더니만 지금은 안 오네요. 그쪽이 많이 올 거라던데 아직 많이 오지는 않나 봐요.”

“어. 아직 그렇게 많아 오진 않네. 야야, 비 많이 온다는데 난 안 왔으면 좋겠다. 담에 오면 되지. 생일이 뭐 대수냐.”

‘대수죠. 2주 전부터 오라고 하셨잖아요.’

“이미 애들 아빠 휴가 냈어요.”

“휴가 냈음 집에서 쉬면 되지.”

“애들 아빠가 알아서 할 거예요. 참, 생신 축하드려요.”

.

.

.

“내 싫은 소리 좀 해야겠다. 시에미가 더운 여름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디? 옆집 할머니한테도 그렇겐 안 하겠다.”

'첫째, 전 옆집 할머니의 안부 안 궁금해요. 둘째, 어머니도 제 안부 안 궁금하시잖아요. 셋째, 어머니 아들이 매주 전화드리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눌렀다. 그래도 생신날 아침인데 싸울 수는 없다. 행여 싸운다고 치자. 나는 안 가니 당장은 상관없지만 생신에 모인 다른 식구들이 폭탄을 맞는다. 시어머니에 대한 일은 모두 연대 책임이다. 한 사람이 시어머니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당사자가 아닌 주변 사람이 혼이 난다.

“네. 전화드릴게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뭐가 그리 정신이 없냐. 시에미한테 전화도 한 통 못할 정도로.”

짧은 통화에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답답함이 몰려왔다.


오후 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물었다.

“엄마 전화했어?”

“응. 할머니가 니가 ‘지 할 말은 다하더라.’ 고 하시던데.”

“응??? 무슨 말?”

“몰라. 그러시더라.”

“하긴, 다했네. 평소 같음 생신 축하드린다 고 하고 끊었을 텐데 아까는 '시험이다. 힘들다.'는 말도 했으니까. 평소에 비하면 길게 통화했다. 엄마는?”

“똑같지 뭐. 전화하라고. 옆집 할머니한테도 그러진 않겠다고.”

“헐. 옆집 할머니면 엄마한테 그딴 소리 안 했겠지. 전화하지 마.”

이럴 때 보면 시어머니가 딸을 부러워하는 이유를 알겠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지만 이렇게 확실한 내 편이 없다.


 



그 후로 2주가 지났다. 젠장 또 비가 온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내 자신을 좀먹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수련이 부족한 나는.....  오늘도.....  나를 좀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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