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회사는 탄력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초기에는 9시 근무 6시 반 퇴근이라는 것에 익숙한 윗분들의 눈총이 있었지만 지금은 제법 자리를 잡아 적정선에서 타협(?)을 한 듯하다.
어제는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출근한 남편의 퇴근이 늦었다. 퇴근한다는 남편의 카톡을 보고 나서야 저녁 준비를 시작하는데 가끔 연락을 하지 않고 출발하는 경우가 있어 퇴근 시간 즈음되면 연락을 기다리게 된다.
“언제 떠나?”
“좀 늦어.”
“ㅇㅇ”
현실 중년 부부의 짧은 대화. ^^
그리고 한 시간 뒤 남편의 전화가 왔다.
“지금 밥 먹고 출발하려고.”
“시간이 몇 신데 당연히 밥 먹고 와야지.”
밥하기 귀찮은 마음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 남편이 밥을 안 먹고 온다면 새로 밥을 해야 했다.
“밥만 먹고 갈 거야. 아침부터 욕만 엄청 먹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남편은 회사일을 내게 잘 말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이야기해도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내가 공감을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 같고 무엇보다 밖의 안 좋은 일을 이야기해 괜히 걱정시키기 싫어서일 것이다.(내가 걱정이 좀 많다. 걱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
“일이 좀 잘못돼서.”
“자기네 부서일?”
얼마 전 끝난 프로젝트 때문인가 싶어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니고 책임자니까 전부 싸잡아 욕먹은 거지.”
“누가 잘못했는데?”
“있어.”
“누군지 알겠다.”
“ㅎㅎㅎ”
남편이 맘에 들어하지 않는 직원이 있다. 중간 관리자임에도 시키는 일만 하려고 하는 탓에 일이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고 그나마 제대로 하지도 못한다고 한 사람. 끝내 사고 쳤네 싶었다.
보통은 여기서 대화가 끝나는데 어제는 웬일인지 남편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 연락망 프로그램이 있거든. 근데 그게 작동을 안 한 거야. 보면 안 되는데 우연히 잠깐 보게 됐는데..”
한참을 이야기하는 남편. 문득 보면 안 되는 걸 보고 이야기해도 되나 싶어 물었다.
“혼자 밥 먹어?”
“응.”
혼자 밥 잘 안 먹는 사람인데 사람에게 짜증이 엔간히 났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10분 남짓 그날 일을 이야기하던 남편은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지 얼른 먹고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주절주절 그것도 전화로 이야기한 걸 보면 오늘의 상황이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다녀왔슙다.” 라며 현관을 들어서는 남편은 여느 날과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샤워를 하고 안마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남편의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짜증이 났다 싶다가도 괜찮아 보이고. 괜찮은가 싶으면 또 짜증 난 목소리고. 본인은 모르지만 딸과 나는 남편의 목소리 변화를 귀신처럼 알아챈다. 아니나 다를까 딸이 “아빠 기분이 왜 저러셔? 좋은가 싶은 나쁘고 나쁜가 싶은 또 웃고 있고?” 한다. “회사에서 일이 좀 있으셨대.” 아마 아까의 전화통화가 아니었다면 나도 딸처럼 또 뭣 때문에 기분이 저러지 싶어 짜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남편의 오락가락하는 기분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동안 오락가락하는 남편의 기분은 어쩌면 우리를 위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식구들 걱정시키지 않으려 속으로 삭힌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동안 남편의 하루에도 수십 번 업다운되는 기분에 우리 역시 눈치를 보며 힘들었었다. 그런데 어제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나쁜 기분을 그대로 들어내 상대방의 기분 역시 상하게 하는 것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배려를 위한 노력이었다면.. 언제나 그렇듯 배려와 이해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다.
또다시 맞이한 아침. 오늘도 남편은 아이를 등교시키고 출근을 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겠지. 울 남편.. 회사가기 싫겠다. 남편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누군가는 위로한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 남들이 다 그러고 산다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해서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데 이 타이밍에 세탁기는 왜 고장이 난 거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