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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Aug 18. 2020

아빠가 갑이 되는 그 날까지..


두 달 만에 세차를 다녀왔다.

10년을 넘게 탄 경유차가 미세먼지의 주범이라며 폐차하라는 국가의 명령(?)을 받은 후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새 차를 뽑았다. 보너스 2년 모은 돈과 내 연금(10년을 부었는데 60세에 받는 금액은 현재 기준 6만 원? 미련 없이 해지했다.), 카카오 뱅크 대출을 더해 멋지게(?) 일시불을 날린 남편. ㅎㅎ 그렇게 우리에게 온 그랜저는 남편의 고가 장난감이다.  처음 차에 시승하던 날 딸과 나는 동시에 남편에게 물었었다.

"신발 벗고 타?"

지금도 우리는 차 문을 닫을 때마다 긴장한다. 너무 세게 닫으면 남편에게 혼날까 봐. ㅋㅋ

처음 차를 사고 남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세차용품 사기. 10년 넘은 경유차는 늘 꼬질꼬질했고 너무 꼬질꼬질하면 주유소에서 주유하고 할인받는 자동 세차를 이용해 대충 닦았기 때문에  세차용품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유리용 타월, 물기를 제거하는 드라이 타월, 때를 불리는 샴푸, 각종 붓, 물을 담는 바구니, 샴푸를 뿌리기 위한 스프레이병도 몇 종류인지.. 나보다 더 고급진 목용용품을 쓰는 녀석이다. 부럽다.



50일이 넘는 장마에 세차를 미루다 드디어 오늘 맘을 잡고 세차를 갔다. 집을 나서는 데 문 앞에 세차용품이 든 가방 2개와 바스켓 2개가 까꿍 웃고 있다. '언제 이렇게 사 모았대?' 티끌모아 태산은 여기에 쓰는 건가 보다. 하긴 그런 점에선 나도 할 말이 없다. 나도 남편처럼 티끌 모아 태산 만든 나만의 장난감이 꽤 있으니까.(요즘엔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 모은다. 언젠가 할 거라는 자기 최면과 싸니까 라는 당위성을 부여하며 스크린 영어 회화 책과 일본어 원서를 열심히 모으고 있다. ^^)


집에서 보면 한가득인 세차용품인데 세차장에 가면 그저 평범한 수준. 실내 세차장에 오는 사람들은 다들 세차가 취미를 넘어 덕질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오랜만에 하는 세차라 비누칠을 두 번이나 했다. 세차에서 내가 담당하는 것은 시간 맞춰 기계가 작동하도록 카드 대주는 일과 세차 끝난 후 타월과 바스켓 세탁. 그리고 그랜저의 내 지분인 바퀴 네 짝을 닦는 일이다. 내가 닦아서 바퀴 네 짝은 내 거다. ㅋㅋ


비누칠하고 광내는데 3시간이 걸렸다. 실내세차라고 해서 에어컨이 가동되는 건 아니다. 겨울엔 실내고 여름엔 창문과 지붕을 개방하는 것이 실내세차.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세차를 하고 나니 팔도 저리고 어지럽기도 하고.. 나보다 몇 배 더 움직인 남편은 몸살이 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힘들다, 아프다 소리도 못한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안마를 해줬다. 늙어 남는 건 남편뿐이니 내 몸인양 아껴야지. 남편님, 곡소리가 절로 나오더군. 밤에는 학원에서 돌아온 딸에게 슬쩍 남편 안마를 부탁했다. 등교 셔틀 혜택을 받는 딸도 군말 않고 안마기를 들었다. 안마기 아래 곡소리 내는 아빠를 보며 딸이 말했다.

 

"언제쯤 차가 을이 될까?"

"응?"

"우리 집은 차가 갑이고 아빠가 을인 것 같아."

딸의 언어능력은 어릴 적부터 참 기발했다. 근데 언어능력과 국어성적은 비례하지 않더군. ㅠㅠ

딸의 말을 들은 남편이 소심하게 말했다.

"아니야. 아빠가 갑이야."

ㅋㅋㅋㅋㅋㅋ


암튼 그래서 얻은 교훈.

세차는 남편이 갑이 될 때까지 3주에 한번 하기. 몰아서 하려니 더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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