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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Aug 24. 2020

며느리도 사람입니다 1


설을 며칠 앞두고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숙모, 할머니랑 아빠가 벼르고 있어요. 엄마가 걱정하세요. 삼촌 오면 싸움 날 것 같은데 그러고 나면 삼촌 다시는 안 올 것 같다고요.”

뭘 벼른다는 건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런 기류가 보인지는 한참 되었고 지난번 일도 있어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내용을 남편에게 전해야 하나 며칠을 고민했다. 별일 아닌 일을 별일처럼 유난을 떠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일부러 전화를 한 걸 보면 형님이나 조카가 보기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기회만 보다 주말을 앞두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즈음 남편은 나와 밖에서 술 한잔 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기 위치쯤 되면 함께 술 마셔 줄 사람이 마누라밖에 없다며. 지금은 회사에 술친구 몇을 사귀더니 툭하면 한 잔 하고 오겠다고 카톡을 날린다. 치사 빤스.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늘 자기가 먼저 술 한 잔 하자고 해야 귀찮은 듯 움직이던 내가 먼저 술 한 잔 하자고 하니 신나서 달려온 남편과 술집에 마주 앉았다.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하고 "웬일이래?"라는 남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자기야, 큰아빠랑 어머니가 벼르고 계신데. 아까 OO한테 전화 왔는데 걱정하더라고. 싸움 날것 같다고.”

남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뭘 벼러?"

"그거야 나도 모르지. 지난번 우리 집에 오신 일도 있고.. 그 일이 아니더라도 그전부터 어머니가 우리한테 섭섭하다 그러셨잖아."

"뭐가 섭섭하시대?"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이 사람아."

"맨날 그러시잖아. 똑같이 키웠는데 둘째 아들은 엄마한테 효도를 안 한다고."

"뭘 더 어떻게 효도를 해?"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나도 우리 부모한테 효도 못해 쫓겨났는데.'

"언제는 어머니가 이유가 있으셨어? 그냥 본인 맘에 안 들면 그러시는 거 알면서."

"할 테면 해보라고 해. 연 끊음 그만이야.”

'에휴. 어머니랑 형 앞에 가면 암소리도 못하는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미워도 싫어도 핏줄인데.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나왔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

"쫌만 참자. 자주 안 보면 덜 부딪칠 거야. 앞으로 짧게 다녀오고 자주 안 가면 되지. 이번만 넘기고 서로 맘 가라앉으면 또 괜찮아질 거야."


시댁과 연을 끊고 싶은 건 사실 나였다. 하지만 기회는 이때다 부추길 수는 없었다. 착한 며느리는 아니더라도 며느리 잘못 들여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얼마 뒤 설이 돌아왔다. 조카가 예고한 대로 시댁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꼬투리를 잡아 야단칠 기회만 노리는 두 분과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기분이 상해 있는 남편이 아닌 척 한 들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었다. 늘 분위기가 안 좋았지만 그 해 설은 진짜 역대급이라고 할 만했다. 내용은 몰라도 눈치는 귀신같이 빠른 아이들은 어른들의 어색하고 싸한 분위기에 이방 저 방으로 숨느라 바빴고 나는 나대로 불똥이 나에게로 튈까 주방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집 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다 큰 애들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 하기도 하는데 명절에 나가도 시어머니께 혼난다. 오랜만에 할머니 집 와서 할머니와 있지 않고 밖으로 나돈다고. 애들이 왜 밖으로 나가는지에 대해선 1도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한 방에 몰려 있어도 혼난다. 할머니 피해 숨는다고. 자도 혼난다. 할머니 집에 와 할머니와 이야기 안 하고 잠만 잔다고.(이쯤 되면 글 읽으시는 분들도 피곤하실 것 같네요.) 그렇게 숨 막히는 이틀이 지나고 내일이면 집으로 갈 수 있다 한숨 돌리던 그때 사고가 터졌다.


제사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던 남편. 갈비찜과 마지막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는데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OO아, 야채도 먹어라. 고기만 먹지 말고.”

“에.”

건성으로 대답한 남편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한껏 비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야채는 그렇게 먹기 싫으냐?”

그 말투에 빈정상한 남편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야채도 먹었어요. 근데 밥을 다 먹어서 그래요.”

그러자 갑자기 입을 꾹 다무시는 시어머니. 당신은 빈정거려도 아들은 고부고분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였지만 시어머니에게는 통하는 이유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상을 치우며 돌아보니 입을 꾹 다문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꼭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제발 그냥 넘어가라.' , '누구든 제발 한 번만 참아라.'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중간을 모르는 시어머니는 끝내 선을 넘으셨다.

“에미가 하는 말은 그렇게 듣기 싫으냐?”

밥을 다 먹어 남은 무 한 덩어리 먹지 않은 것이 왜 그렇게 비약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정 엄마가 그랬다면 그 자리에서 대판 싸우고 짐 쌌을 나지만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나는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참아. 내일이면 집에 간다. 그럼 추석까지 안 보잖아. 쫌만 참아.’


하지만 벼르고 계셨던 시어머니는 멈출 생각이 없으셨다. 기필코 아들에게 사과를 받고 본인이 원하는 대접을 받아야겠단 생각이셨다.

“툭 까놓고 얘기해보자.”

뭘 맨날 툭 까놓고 얘기하자는 건지. 툭 까놓고 얘기하면 화내며 어차피 듣지 않으실 거면서. 시어머니가 툭 까놓고 얘기하자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거지 우리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이 아니다. 툭 까놓고 얘기하자고 시작한 대화는 늘 "너희 넷 다 똑같아. 남편복이 없으니 자식 복도 없어. 남편이 무시하니 자식새끼들도 에미를 무시해."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그날도 그랬다. 시어머니의 성격을 아는지라 보통은 다들 입을 다물고 시어머니의 한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그 날은 남편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뭘 툭 까놓고 얘기해요. 할 얘기 없어요."

"불만이 뭐냐? 에미한테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불만 없어요."

"어디 얘기해 보자."

불만이 없다고 해도 불만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대화. 그저 본인의 화를 풀겠다는 일방적인 싸움이다.

“엄마, 이제 얘들도 컸고 한데 좋은 말만 하고 삽시다.”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지만 남편은 좋을 말만 하며 살자고 에둘러 말했다. 남편의 말에 시어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을 꾹 다무셨다.


남편은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남편은 돌리고 돌려 참고 참다 한 마디 한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시어머니에게 그 말은 감히 니가 였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집안 공기는 냉각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조만간 터질 싸움을 피하기 위해 PC방으로 도망을 갔고 형님은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와 남편, 시어머니만 남은 집. 맘 같아선 그 밤에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오면 진짜 싸움이 커질 거라는 걸 나도 남편도 아는지라 이 밤만 넘기자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다. 잠시 후 안방에 들어가 계시던 시어머니가 산책을 나가셨다.








늦은 밤 밖에 나간 아이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끝났어? 우리 이제 들어가도 되나?”

애들이라고 할 수 없는, 중고등학생 앞에서 어른이 할 짓이 아니다. 모범은 관두고 평범만 해도 좋겠는데 이건 평범이 아니라 잘못된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다.

“할머니는 산책 나가셨고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넘어가려나 봐. 들어와도 돼.”

전화를 끊고 잠시 후 시어머니가 산책에서 돌아오셨다. 눈길도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시는 시어머니를 뒤로 하고 남편은 거실에, 나는 우리가 머무는 현관 옆 방에 문을 열고 앉아 있었다. 나란히 앉아 TV 보는 것도 시어머니 눈에는 거슬릴 것 같았고 행여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의 칼날이 나를 향할까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다. 만만한 게 며느리라.. 그런데 잠시 뒤 방문을 열고 나오신 시어머니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남편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셨다. 시어머니 같은 사람들은 늘 자신은 힙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착각을 한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시어머니가 대화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말을 그렇게 나쁘게 한다는 거냐. 남편이 무시하니 자식새끼들도 에미를 무시하기나 하고.”

“애들도 크고 하니 좋은 말만 하고 살자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 한 겁니까?”

그냥 화를 내기 위한 시어머니의 행동에 남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생떼를 달래기 어려운 이유는 본인도 왜 생떼를 부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화가 나..  그날의 시어머니가 그랬다. 화를 내시고 계시지만 왜 화가 나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왜 화가 나셨는지 아셨을까?

“니네 넷 다 똑같애. 한 놈도 나은 놈이 없어. 내가 니들한테 못 해 준 게 뭐가 있냐.”

어두운 방 문 옆 벽에 기대어 간간이 들리는, 수백 번은 들은 레퍼토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휴, 저 멘트 지겹지도 않나. 뭘 맨날 당신을 무시하고 넷 다 똑같아 똑같긴.'

'당분간 전화하면 나에게 화를 내시겠네.'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하지.'

'왜 자기 아들한테 섭섭한 걸 맨날 내가 잘못했다 해야 하지? 진짜..’



남편이 대꾸를 안 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시어머니의 화풀이는 30여 분간 지속되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화풀이에 나는 돌아올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이걸 피해 몇 시간을 밖으로 떠돈 아이들인데 지금 들어오면 같이 혼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 누구나 화풀이 대상이 된다. 이제 시작되었으니 조금만 더 있다 들어오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시어머니도 지치셨는지 "너희 네놈다 똑같아."라는 마무리 멘트를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시는 시어머니가 마지막 핵폭탄을 날리셨다.


“어휴, 며느리까지 그딴 게 들어와 가지고.”


소파에 앉아 있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의 남편 얼굴을 보며 오히려 나는 담담했다. 아니 막장 드라마같은 전개에 현싥감각을 상실했다고 해야 하나.


'저요?'

'며느리들이었나? 나한테는 그래도 형님한테는 그러면 안되지.'

'아니, 며느리였나?'

'난가?'

'내가 왜 거기서 나오지?'

'뭐지? 뭐지?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는?'



남편도 나도 이 싸움의 결말이 이렇게 날 꺼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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