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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Sep 14. 2020

우리를 멘붕에 빠트린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토요일은 두 달에 한 번 가는 남편의 정기검진일이었다. 피검사 후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예약 시간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시간에 출발한다. 병원과 집의 위치가 끝과 끝이라 일찍 나서야 차가 막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검사 결과가 빨리 나오기라도 하는 운수 좋은 날이면 예약 시간보다 일찍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






두 달 전 검진 때의 일이다. 먹으면 안 된다는 술을 간간히 한 상태라 피검사 결과가 좋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뜻밖에 피검사 결과가 좋아 의사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 가끔 이렇게 검사 결과가 좋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좋다기보다 걱정이 앞선다. 호전이건 악화건 이유를 모르는 결과는 늘 불안하다.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터라 내 나름대로 분석을 해 봤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검사 결과가 한 템포 늦게 나오는 것 같아.”

“에이 그런 게 어딨어?”

검사 결과에 만족스러운 남편은 부정했다.

“아냐. 왜 재작년에 일본 여행 다녀와서 바로 검사받았을 때도 술 마시고 바로라 검사 결과 안 좋겠다 했는데 평소보다 좋았잖아. 의사 선생님이 우스갯소리로 ‘일본술이 맞나 보네.’ 하셔서 웃었었는데 기억 안 나?”

“설마 그럴라고. 그냥 그런 거지.”

“아냐. 봐봐. 분명 다음번 검사에 이번에 술 마신 거랑 다 반영돼서 수치 안 좋게 나올 거야.”

“악담하는 거지?”

“아니. 결과가 좋으면 좋지만 너무 믿지는 말자고. 검사 결과가 위험이라고 하면 그땐 보통 손 쓸 수 없을 때인 것 같아서.”



그리고 다시 두 달이 지났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실행으로 간간히 하던 친한 동료들과의 술자리는 사라졌지만 일주일 여름휴가기간 동안 집콕하며 알차게 먹은 남편은 몸무게가 1킬로 늘어버렸다. 군대에서 체질이 바뀌었다는 남편은 대체적으로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편이다. 그것도 맛나게.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나게 먹으면 살이 찐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소리는 거짓말이지만 맛나게 먹으면 살찐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음식을  앞에 두고 께작께작 하는 것보다 맛있게 먹는 게 음식 한 사람 입장에서는 고맙고 좋지만 문제는 남편의 건강이다. 집에 있는 것은 답답하다면서도 운동은 싫어한다. 살이 쪄서 운동을 싫어하는 건지 운동을 싫어해 살이 찌는 건지 애매한 상황. 배고파서 먹고 입이 심심해서 먹고 TV 속 남이 먹는 게 맛있어 보여서 먹고.. 그렇게 먹고 몸무게를 보며 반성한다. ‘오늘까지만 먹고 다이어트할 거야.’라고.. 근데 어떻게 매 끼니가 최후의 만찬인 건지..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이 늘 하시는 인사말을 건네셨다.

"잘 지냈어요? 약은 잘 먹고? 주사는 잘 맞고?"

"네."

“염증 수치는 좋네. 그런데 나머진 다 빨간색이네요. 간 수치도 올라가고. 콜레스테롤 수치는 150이 정상인데 270이 넘었어.”

“....”

남편과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 정도면 심근경색이 올 수도 있어요. 가슴 아파서 부여잡고 쓰러지는 거 알죠?”

“네.”

“이건 살쪄서 그런 거야. 특히 복부. 살쪘죠?”

“네. 좀 늘었어요.”

의사 선생님 앞에만 가면 순한 양이 되는 남편.

“뱃살만 빼면 다 좋아져요. 살찌면 무릎에 또 물 차고 힘들어져.”

의사 선생님은 늘 똑같은 말씀을 하시고 남편은 늘 똑같이 한 귀로 흘려듣는다. 옆에 있는 나만 애가 타 속으로 의사 선생님께 하소연을 한다.

‘그니까요. 제 말은 죽어도 안 들어요. 술, 담배 하지 말라고 해도 안 들어요. 그렇게 죽으면 저승까지 따라가 괴롭힐 거라고 협박해도 안 들어요. 이 남자 좀 혼내주세요.’

남편에게 살 빼라고 한참 설교를 하신 의사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맛있는 거 해 주지 마세요.”

“네.”

‘안 해줘요. 그냥 자기가 사 먹어요.’

“기름 안돼요. 참기름, 들기름, 식용유..아니다. 프라이팬 스치고 지나간 건 아무것도 주지 마세요.”

“네.”

“풀만 주세요. 풀만..”

“네.”

“토끼 알죠? 토끼처럼 주세요.”

우리를 믿지 못하시는 듯 의사 선생님은 다급하게 예를 드셨다. 남편의 얼굴에 잠시 절망적인 표정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난 왜 웃음이 나지. 이 심각한 상황에서.. 남편이 토끼처럼 풀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단군신화 속 곰이 떠올랐다. 마늘과 쑥만 100일을 먹은 곰이..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오늘 마지막으로..”

“야!!!!  마지막이 도대체 몇 년 짼지 알아? 죽는대잖아. 좀 참아. 아들 운동 나갈 때 운동도 따라가고.”

“뺄 거야.”

“의사쌤이 토끼처럼 먹으래잖아. 토끼!!! 풀만!!!”

"알았어."

어차피 소 귀에 경읽기겠지만 순하게 말하면 순하게 무시하는 터라 세게 말했다. 고기를 줄여야겠다 다짐하면서.


잠시 후 앞을 바라보며 운전하던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근데 토끼도 고기 먹지 않나?”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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